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31주일 모든성인대축일 마태5,1-12ㄴ 진복팔단(안녕성당)

jasunthoma 2015. 11. 5. 04:42

수능이 불과 십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11월 12일 목요일

수능생들이 열심히 공부한 만큼 모두가 다 1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높이 나는 것과 멀리 보는 것이 행복한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어떤 참새가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동료들보다 더 높이 날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자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해 졌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높은 곳에서 머물고 있는데 어디선가 꺄르륵 꺄르륵 하며 즐겁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아래서 날고있는 참새들이 함께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높이 나는 참새는 생각했습니다.

남들보다 높이 올라가고 또 그만큼 더 멀리 보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였습니다.

주위를 돌아다 보니 자기 옆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가 꺽이고 풀이 죽어서 저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 멀리서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는 자기는 물론 저 아래에있는 동료들이 모두 위험에 처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다가온다고 알렸습니다.

그 덕분에 참새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했습니다.

 

동료 참새들은 높이 나는 참새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가 꺽이고 풀이 죽어서 불행할 뻔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높이 나는 것을 그만 두려고 했는데 실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또다른 이야기 하나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양치기 소년 이야기입니다. (늑대소년 이야기)

양들은 들판에서 풀을 열심히 뜯고있는데 양치기 소년은 언덕위 나무 그늘에 누워서 열심히 졸고 있었습니다.

졸다가 졸다가 너무 심심해서 언덕 위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열심히 풀을 뜯다가 말고 양들은 모두 허둥지둥 도망쳐서 언덕위로 올라왔습니다.

언덕위에 올라와서 들판을 바라보니 늑대는 없었습니다.

늑대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양들은 다시 풀을 뜯으러 들판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언덕위에서 소년은 또 외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에 양들은 또다시 언덕위로 피신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언덕위에 올라와 들판을 바라보니 늑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늑대가 없는 것을 확인 한 뒤 양들은 또 다시 풀을 뜯으러 들판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시 늑대가 나타났다!!! 하고 소년이 외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소년의 외침을 듣고 양들은 콧웃음을 쳤습니다.

이번에도 거짓말일꺼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선언을 하십니다.

여덟가지 행복한 사람을 지목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목한 여덞명의 사람이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온유한 사람에게는 땅이

올바름에 목마른 사람에게는 만족이

자비로운 사람에게는 자비가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모습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옳은 일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주어질 것이니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그럴까요???

실재로 그런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주어진다고 하지만 실재로는 마음이 가난하면 그 마음 속에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삭막한 사막이나 광야가 펼져집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구박맞기 일쑤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에게는 땅이 주어지는 것이아니라 사람이 온유하면 그나마 있는 땅도 쉽게 빼앗기게 됩니다.

자비로운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비를 입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비로우면 그 사람 밑두리까지 다 벗겨가서 거들내 버립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 곁에는 항상 악마들이 먼저 나타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로우면 한량이라며 놀리거나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손가락질 합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거나 올바로 살기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흡족함이나 하늘나라가 아니라 굶주림과 감옥살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을까요???

세상 돌아가는 원리로 보자면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에서 핵심히라고 할 수 있는 참행복, 진복팔단입니다.

그냥 행복이 아니라 참 행복이며 그냥 복이 아니라 진복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 만큼 더 청구하신다" 하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많이 가지려 하고, 많이 맡으려 하고, 많이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말씀이 부담이 되는 분들도 있고

이 말씀이 위로가 되는  분들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것이 부담이 되기도하고, 위로가 되기도 하고 있습니다.

부담이 되는 부분은 다들 아시다시피 그러한 몇가지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것은 딱 사제서품만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더도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였다는 점입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제게는 큰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고 많이 차지한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 많이 청구하시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책임질 일은 하지 말고 부담되는 일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이러한 부담을 느끼는 것은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는 격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준비된 사람이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그것을 도둑맞은 거나 다름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 만큼 더 청구하신다는 말씀은

요즈음 저에게 탐욕을 조절하라는 위로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행복은 탐욕에는 반비례하지만, 부러움엔 비례합니다.

행복은 도둑들도 부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다면 도둑들도 찾지 않는 다는 말과 같습니다.

탐욕쪽에서 보면 탐욕은 그 자체로 탐욕의 대상이 깨어있지 못하도록 해야하기에 행복하지 못하지만

행복쪽에서 보면 부러움은 서로 깨어있도록 준비하기 때문에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높이 나는 새가 멀리보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높이 아는 것이 행복한 일은 될 수 있을 지언정 높이나는 것 자체가 참으로 행복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 행복일까요???

참 행복이란 높이 날아서 멀리 볼 수 있을 때에 그 일이 외롭고 고독하더라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과 참 행복 사이에 고통과 시련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높은 사람이 되는 단순한 어려움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시련과 고통이 행복과 참 행복 사이에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행복은 나 자신만 열심히 노력만 하면 되지만 참 행복은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 명성에 십자가를 씌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지만 참 행복은 다함께 행복해야 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만족할수 있는 것은 만족하고 부러워할 수 있는 것은 부러워해서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