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는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거지가 눈을 뜨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군중들의 시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눈먼거지가 길가에 앉아있다가 나자렛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 잠시 머물러 보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거지는 왜 "나자렛사람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괜시리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님 이름을 노래하며 (예수이름으로 예수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지나갔을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많은 인파가 지나가자 눈먼거지는 무슨일인고 하며 사람들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나 많은 군중들은 왜 하필이면 눈먼거지에게 "나자렛사람 예수님"이라고 알려주었냐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거나 랍비(스승님)이라고 하거나 그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컬어서 공식적으로 부르던 이름이 있었는데도 왜 그랬냐는 것입니다.
그때에 공적으로 부르던 이름중에 나자렛사람 예수님은 포함되지 않던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자렛사람 예수님은 예수님을 폄하하거나 비하할 때에 또는 깍아 내릴때에 부르던 비공식적인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마태16,13; 마르8,27; 루카9,18) 하고 물었을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불렀던 이름과 제자들이 고백한 이름은 따로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자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예언자 // 베드로는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군중들은 눈먼거지에게 예수님의 이름 중에서 비공식적인 이름을 알려주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가 거지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자리에 왕실관리자가 서있다가 지금 지나가시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알려주었을까요???
바르티메오가 눈먼거지였기때문에 나자렛사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말로하면 나자렛의 가난뱅이이니까 너에게 줄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분에게는 제발 구걸하거나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암묵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겸손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무슨 일만 시키면 난~~ 못해~~ 할줄 몰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경솔한 모습입니다.
거지를 다른말로 하면 노예신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은 인간의 비굴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노(no)할 것을 예(yes)하는 사람들이 노예이며, 강한사람에게는 약하며 약한사람에게는 강한모습이 바로 노예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더 나아가 오늘 복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약한사람에게 더 약한척하는 모습이야말로 노예중의 상노예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오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거지는 군중들의 이러한 모습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이 거지신세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올바로 알려주지 않고 폄하시키며 조용히하라, 잠자코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며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노예근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눈먼거지는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세상을 온몸으로 보았기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으로 못보면 눈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눈먼이는 온 몸으로 느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눈을 뜬다는 것은 우리몸이 깨끗하게 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밝으면 눈도 밝습니다(루카11장; 마태6장)
실제로 우리 시력도 몸이 좋으면 밝아지고 몸이 좋지 못하면 어두워집니다.
운전면허 갱신 적성검사~~~
몸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작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 더욱 작아질때에 세상은 더 밝고 더 크게 보이는 이치입니다.
망원경의 원리입니다.
한가위 슈퍼문을 볼때에~~~
오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거지는 자신이 작아지고 낮아졌기에 예수님을 있는그대로 크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망원경을 거꾸로 돌려서 보면 아무리 달이크고 훤하게 비친다하더라도 작고 보잘것 없는 것이 저 멀리있는 것 같은 원리와 같습니다.
실재로 가까이 있지만 망원경을 돌려서 보기때문에 멀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커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크고 상대방이 작기때문에 멀게되는 것입니다.
눈이 멀었다는 말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르톨로매오라는 눈먼거지가 있었던 곳은 예리코로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생활을 끝내고 새로태어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새 사람이 되었듯이 오늘 눈먼거지였던 바르톨로매오도 새로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눈먼이는 겉옷을 벗어 던져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또다른 제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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