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원수에게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을 전체적으로 읽다보면 자비로운 사람은 곧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잘 해주고, 나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나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고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사랑(레위19,18)하라는 말과 더불어 '원수는 미워하라'(?)는 마태오 복음(5,43)의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아라(민수31,2-3)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사랑(신명6,5)하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며 원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해야 율법규정을 지키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입니다.
무슨 오류가 있을까요?
구약에서 이웃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원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할 때에
이웃인 형제를 사랑하되 원수인 이방인은 미워해야한다는 규정에 무슨 오류가 있길래
예수님께서는 마땅히 미워해야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까?하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서로 옆을 잘~ 보십시오!! 이웃이 이웃으로만 보입니까? 꼭 형제가 형제로만 보입니까?
이웃이 사랑스럽게만 보이면 좋겠지만 때론 이웃이 원수가 되는 날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웃이 원수가 되는 날에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죽고 원수에게 복수하라는 구약의 율법이 다시 이웃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웃은 더이상 영원한 이웃일 수 없고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이웃으로 탈바꿈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그런 사람만이 내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규정의 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이웃이 이웃으로 보이지 않고 원수로 보일 때조차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될 때 진정한 이웃사랑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바오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우상도 죽음도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기위하여 존재하듯이 우리의 이웃도 우리의 원수도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레위19,18)과 하느님 사랑(신명6,5)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음으로든 양으로든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자비로운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박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불행입니까? 다행입니까?
복음적으로 살아가는 한 결코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게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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