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고 합니다.
어떻게 가르치셨길래 사람들이 몹시 놀라게 된 것일까요?
본문에 의하면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때문에 그토록 놀라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무엇일까요?
그 권위있는 말씀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본문 35절에 그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 영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을 가르치십니다.
즉 영을 다스리십니다.
거룩한 영이든 더러운 영이든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언제나 영이십니다.
영을 가르치시되 선한영은 살리시고 악한 영은 꾸짖으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제 제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고작 80년이라 했는데 저는 근력은 딸리지 않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딸릴까요? 머리가 좀 딸립니다. 즉 영이 영발이 좀 딸리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근력만 놓고 본다면 이제 저는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절기상으로는 인생의 절반을 살아와서 불혹에 접어들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불혹에 접어들어도 영적으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서 부쩍 제 영적인 매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육신은 영혼의 거처일 뿐이라는 생각이 이제는 그냥 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이 세상은 영혼의 솜사탕을 갊아들이는 하나의 나무젓가락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온 우주에 감도는 하느님의 영을 아주 가볍고 보잘 것없는 막대기로 하나로 휘저어 부드러운 향기와 아름다운 색갈과 달콤한 맛을 한데에 모아들이고 갊아들이는 나무젓가락 같은 것이 이 세상이자 우리의 육신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마음에 와 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제 주변을 놀라게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건강한 사람들이 쓰러져서 실려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꿋꿋이 싸우고 견디고 인내하며 잘 살아갈 것만 같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나가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직장도 튼튼하고 ... 저하고는 정 반대죠???
그런데 그렇게 좋은 육신을 가졌는데 왜 쓰러지는 걸까요?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더렵혀졌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은 자존감, 수치심, 모멸감, 분노함, 자격지심으로 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내가 힘들고 지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영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회당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모욕한 사람은 체격좋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좀 있어보이고 뭐를 좀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서도 꿋꿋이 꿀리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몇년을 함께해도 그분이 누구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제자들과는 달리 학식과 경륜 그리고 근력까지 탄탄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솔했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결국 영혼이 병들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큰소리치며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차 이 세상에서 이루실 하느님의 구원계획까지 마치 자기가 온전히 다 알고 있듯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제가 아는 지인이 맹장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했습니다.
그분은 자기병을 자기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남은 여생을 보낼것인지도 다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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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간은 인간인 자신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큰 소리를 질렀던 사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자신의 학식과 경륜을 반영한 세상의 영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키셨다가 다시 결합시키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하느님을 알아보고 이리저리 따졌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며 보잘 것 없는 시골 출신이신 예수님의 인성을 꼬집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신성을 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며 예수님을 극도로 높였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알아본 하느님의 속성을 예수님의 겉모습에 뒤집어 씌웠습니다.
높였다가 낮췄다가 낮췄다가 높였다가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다루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마음대로 다루었던 것입니다.
하느님 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다가 예수님이 죽으실거라고 하자 자기가 예수님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던 장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세상의 눈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을 알아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던 더러운 영이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난 다음 소리높여 예수님을 지켜드리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들어간 세상의 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에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시고 확실하게 꾸짖으십니다.
그 사람을 보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어떤 영이 들어앉았는지에 따라 꾸짖으시기도 하고 칭찬과 축복을 해주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잘 꾸짖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그처럼 올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거룩한 하느님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가제는 게편이라고 더러운 영이 추한 영을 꾸짖을 수 없습니다.
동병상련이라서 그럴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딱딱하고 완고한 육신을 지닌 비참한 인간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고맙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1서의 말씀대로
"현제적인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오늘 하루 내 영혼이 구원의 샘이신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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