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3주간 금요일 루카6,39-42 감추어둔 들보 (제주협력자)

jasunthoma 2014. 9. 12. 06:11

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네 것이다라는 말씀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대로 모두 좋았던 것은 그들이 천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천상에 비하면 불의하고 불공평한 곳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티와 들보의 예를 들어 자기 자신의 허물을 먼저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들보에 비한다면 티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티가 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요즘에는 콤바인이 있어서 탈곡기를 돌려서 타작할 일이 없어진 것 같은데요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콤바인이 없어서 탈곡기를 경운기에 걸어 타작을 했습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동원되어 타작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타작을 하다보면 눈에 티가 부지기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탈곡기가 돌아가고 있을 때에는 왠만하면 꾹 참고 부지런히 볏단을 풀어헤쳐 탈곡기앞으로 가져다 놓고 쌓여가는 검불을 걷어내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탈곡기를 감아 돌리던 밸트가 빠지기라도 하면 그제야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숨을 돌리게 됩니다.

그럴때야 비로소 눈에 들어간 티를 빼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눈에 티가 들어가면 어떻게 빼내십니까?

세수를 하기도 하고 눈물이 고여있으면 입으로 불어서 빼내기도 할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손으로 빼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제 작은외숙모의 방법은 그야말로 최고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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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티가 이정도인데 들보가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실 들보는 눈에 들어갈 만큼 작지 않습니다.

들보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집짓는 재료 중에서 들보만큼 큰 것은 없습니다.

 

무우사 이야기

기와 2만 서까래 200만 기둥 500만 들보 1,000만

그렇다면 제 눈에 들보를 먼저 빼내라는 말은 눈에 티가 들어가듯이 눈 속에 들보가 들어갔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티고 무엇이 들보일까요?

 

수련기때에 인근 본당 주임 신부님들을 초대해 놓고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수련장 수사님으로부터 지원자 형제들과 노래를 한 곡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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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 이라는 것은 자기 우월함을 드러내려는데서 발생합니다.

우상은 허상과도 같은 특성을 지니고있습니다.

그런데 눈에보이고 손에 잡힌다고 모두가 실체가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허상이고 허물인데 그눈에 보이고 그 손에 잡히는 것이 참일 수없고 실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주과학적으로는 시간만이 영원한실체입니다.

시간 안에서 본다면 나 자신은 지금 이시간 이때에 잠깐 기억되었다가 영원한 시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이든 소유하기를 갈망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의 표상이 재물이나 권위라면 그보다 더 확실한 우상은 없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우쭐거림은 많은 경우 재물의 힘, 또는 자기 권위에서 나오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우월함이 고통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멀리하고 있다면 그것은 실체가없는 허상을 우상으로 섬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들보는 걷으로 드러나 보이는 커다란 건축자재가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앉은 자기 우월감과 이기심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속은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라고 말씀하실 때 속은 과연 어디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어디가 속이고 어디가 겉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간과하며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요즘은 속병을 앓는 분들이 많습니다.

속의 속병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속의 겉병이기도 합니다.

이는 겉이 심하게 훼손 되었는데 속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을 들여다 본다고 하지만 겉만 보고 깨끗하다고 진단합니다.

 

평화방송에 근무하시는 지인이 맹장으로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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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한 분이 맹장이 파열되어 수술을 하다가 대장 겉에 붙어 있는 점액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장내시경을 했는데 그 때는 아주 깨끗하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을 비워냈으니 깨끗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이었겠지요.

뭐든지 비워내고 보면 깨끗해 집니다.

지금은 마음을 비웠다고 하면서 밝은 표정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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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사람 속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 실시하는 각종 건강검진은 실은 겉만 훌터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깥에서 받아들인 것은 모두 바깥으로 나가버리기 때문에 흔히 우리 속에 담아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흐르고 통하는 모든 곳은 속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개방되어 있는 것을 물리적 힘으로 막아 놓는다고해서 그 내부가 속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혈관도 마찬가지이고 뱃 속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피부를 통해서 수분이 증발하고 땀이 흐르기 때문에 인체의 어느 한 곳도 속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은 속이 아닙니다.

 

겉이 아니라 정말 속에 해당되는 것은 마음이고 정신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조차도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을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 그릇에 담긴 본질에 따라서 우리는 거룩해지기도하고 탐욕스러워 지기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담긴 탐욕과 방종을 먼저 빼내라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탐욕과 방종은 낙타도 통째로 삼키고 들보를 제 눈에 넣고도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이기심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들보에 해당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회적 불의는 적은 노력으로 많은 이득을 취하려는 경제적 탐욕인 이기심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충실한 일꾼은 손쉬운일 가벼운 편한 일을 찾아 다니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고난을 겪고 모욕을 당하였지만 '격렬히 투쟁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합니다.(1테살2,2)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생기기 때문에 그토록 고통을 감수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내 눈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는 예물인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신의를 지키는 일이야 말로 속을 깨끗이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시편 14편에 우리의 눈 속을 깨끗이 하는 이는 어떤 사람인지에 관하여 노래했습니다.

 

"해 돌아올 맹세라도 어김없이 지키는 이

길미를 받으려고 돈을 놓치 않는 이,

무죄한 이 다칠세라 뇌물 받지 않는 이오니

이같이 하는 그 사람은 쓰러질 리 없으"(시14.)며

당신 장막에 묵을 이 이며, 거룩한 당신 산에 살 이 일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속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우리의 눈도 깨끗해지고 밝아 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탐욕없는 순수한 그리스도의 향기인 우리의 순결한 믿음을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