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부활제2주간 목요일 요한3,31-36 (240411 스승/ 행운동성당// 160403 ---)

jasunthoma 2024. 4. 11. 06:00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관한 증언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 그분에게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요한1,32) 이 때의 성령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입니다. 즉 성부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성령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한다는 말이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증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하늘에 올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게 되면 당신 또한 아버지 하느님처럼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즉 아드님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 전례력 안에는 두번의 대림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번째 대림은 육화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이고 두번째 대림은 교회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당신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내려보내 주심으로써 교회가 시작되고 교회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성령이 있고 아들의 성령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한 성령은 아버지의 성령입니까??? 아드님의 성령입니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에 관해서 교회 교리서에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조차 이 관계성에 관해서 만큼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신경(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의하면 성자는 위격과 본성이 있는데 성자의 위격은 성삼위의 둘째 위격으로 나누어지고 본성은 신성과 인성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제2위격인 성자의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있습니다. 두 본성은 하나의 위격입니다. 성자가 육화되었더라도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거나 신성이 인성에 흡수됨이 없이 성자의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있음을 에페소 공의회에서 확정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네번째 공의회인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를 이렇게 정의 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서로 혼동도 변화도 분할도 분리도 없다’” 즉 하나의 일체이지만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양성이 하나의 일체를 이루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바오로가 삼위일체를 설명하시 위하여 코린토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몸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성또한 생각과 정신과 영혼의 다양함의 일치로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단성설에 맞서 올바른 그리스도론 형성과 확립을 위해 큰 역할을 했던 분들을 교회에서는 교부들이라고 칭하는데 동방교부들이 먼저 그 역할을 했습니다. 4대 동방교부들은 연대순으로 아타나시오(295-37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329-389), 대바실리오(330-379), 요한크리소스토모(345-407)입니다. 그리고 4대 서방교부들은 연대순으로 암브로시오(339-397), 예로니모(347-420), 아우구스티노(354-430), 그레고리오 대교황(345-407)입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단성설에 맞서 올바론 그리스도론 형성과 확립을 위해 이단들과 맞서 싸웠고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성부와 성자가 온전히 하나이면서 성자 안에 두(본성 인성과 신성) 또한 온전히 하나라는 올바른 그리스도 신심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김영식 "간추린 가톨릭 교회사" 불휘미디어 2024, 35-74쪽 참조 -

따라서 우리는 성령 또한 성부와 성자를 따로 분리시키지 않고 하느님의 일체로서 발한다고 확정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바오로수도회 창립자 복자 알베리오네도 바오로가족을 설립하실 때에 10개 단체(성바오로/바오로딸/스승예수/선한목자/사도의모후/예수사제/성모영보/가브리엘/성가정/협력자회)를 각각 고유한 개별 지체로 만드셨습니다. 열 개의 가지로 형성된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습니다. 이 열 개의 가지는 스승이신 예수님과 사도이신 성바오로 그리고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에게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그루의 나무에 열개의 가지를 뻣은 나무입니다. 스승이며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뿌리이며, 사도 바오로의 정신은 줄기이며, 사도의모후이신 성모님의 눈길아래는 나뭇잎에 해당됩니다.

 

 

 

부활제2주간 목요일 요한3,31-36 (160403 ---)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한량없이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성령을 불어넣주셨습니다. 그런데 열두제자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때에 토마스는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다른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힘주어 말했을 때에 토마스는 이렇게 맞섭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당신들이 본 스승님은 실체가 없는 유령에 불과한 것이오라는 말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시어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과 믿음에 관해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보고서야 믿는 제자들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보지않고도 믿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은 불완전한 인간의 시선을 완전한 하느님의 시선으로 변화시켜 주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즉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은총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곳이 어디일까요??? 머리->가슴/ 가슴->발바닦,손바닥??? (볼리비아까지 비행거리가 2만1천Km) 지구 한바퀴 거리는 적도 기준으로 4만75Km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먼곳은 2만Km 하고 37,5Km 가 떨어진 곳이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멀리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워져 버립니다. 즉 인간의 세상은 곡선으로 굴절되어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인간의 눈으로는 수직을 볼 수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굴절이 되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눈이 아니고서는 굴절된 세상에서 수직선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보고 믿는 믿음이야말로 최고로 하느님의 가까운 시선이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감각으로 보는 눈이 우리의 불완전한 인간의 시선을 완전한 하느님의 시선으로 변화시켜주는 이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음이라는 성령을 모두에게 주신 이유는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을 노래하고, 죽더라도 살아나고, 첫째가 꼴지되고 꼴지가 첫째되는 평화를 모두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늘 하루 그러한 믿음을 주신  예수님 안에서 보이지 않는 믿음인 성령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