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성주간 월요일 요한12,1-11 라자로의 부활 (20240325 부산협력)

jasunthoma 2024. 3. 24. 21:20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보다 라자로의 이름이 더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라자로의 이름은 다섯차례나 나옵니다. 그래서 라자로를 오늘 복음의 중심에 두고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 조금 이상한 점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라자로의 부활에 관한 것이고 두번째는 라자로가 예수님 곁에 있는 장면입니다.

먼저 라자로의 부활에 관하여 라자로를 소개할 때에 이렇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신(에게이로) 라자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부활시키신라자로가 아니라 “...다시 일으키신라자로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대화중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나는 부활이요...”라고 당신 자신을 지칭하실 때에 부활은 아나스타시스입니다. 성경에서 아나스타시스는 예수님과 성모님께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에 부활하셨을 때에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지 않고 나타나시어혹은 오시어또는 되살아나시어라는 의미의 에게이로를 사용합니다. 즉 라자로에게 사용했던 에게이로를 예수님께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나스타시스라고 가르쳤던 부활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오히려 당신이 죽으신 다음에 부활하시자 당신의 제자들은 당신에 관해서는 모두 에게이로(오시어, 나타나시어, 되살아나시어)”라고만 하여 당신께서 직접 부활시키신 라자로의 부활과 당신의 부활이 동일한 부활이라는 점을 라자로의 부활 에게이로를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라자로가 예수님 곁에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는데 그곳에 있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그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저녁만찬 잔치였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여기서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라고 전해주는 부분입니다. 라자로가 식사하는 장면은 식탁에 앉은 모습이 아니라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에 끼여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앉은 이들 가운데 끼어있다라는 말은 그리스어성경 본문에는 아나케이메논νακειμενων으로 되어있습니다. 아나케이메논의 원형 아나케이마이ανακειμαι“~유래하다, ~매달리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로부터를 의미하는 접두사 아나ανα를 제외한 케이마이κειμαι꼼짝않고 누워있다, 죽어쓰러져있다를 의미합니다. 이 장면을 여러 성서신학자들은 고대근동의 식사풍습에 따라 예수님께서 비스듬하게 누워서 식사하셨을 것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비스듬하게 누워서 식사를 하셨으면 라자로는 예수님의 어느쪽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을까???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쪽에 있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의 발쪽에 있었을까????입니다. 만약에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지 않고 머리에 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왜 향유를 머리에 붓지않고 발에 부었을까요???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이야기는 네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루카복음과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만약에 마태오나 마르코복음에서처럼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면 예수님 곁에 끼어 있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머리쪽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자로가 예수님의 머리쪽에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엇던 이유는 예수님의 발치에 라자로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와 마르타는 라자로를 예수님만큼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부활한 라자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마리아로 하여금 예수님께 향유를 붓게 만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언제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마르타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마르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11,24)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마지막 날이 아닌 바로 그 시간에 라자로를 부활시키십니다. 왜냐하면 그시간에 마리아와 마르타가 애타게 부활을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날 심판때에 모두 부활하겠지만 그 때가 오기 전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음을 라자로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물며 매일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몰약은 코미포라라고 불리는 나무에서 유래합니다. 코미포라 나무는 흥미로운 나무입니다. 그것은 가시가 있는 나무입니다.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인도에서 자랍니다. 코미포라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면 그곳에서 수액이 나옵니다. 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은 즉각적으로 tear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합니다. tear는 공기와 닿아 검붉은 색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몰약입니다. 몰약에서 추출한 추출물은 소독제입니다. 몰약은 상처를 깨끗이 하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강력한 치유제이며 예수님 시대에 가장 강력한 치유제 중 하나입니다. 아주 향기로운 향수로 만들 수 있지만 가장 큰 용도는 죽음에 있었는데 향료로 만들어 인체의 부패 냄새를 압도했습니다. 그래서 가시로 왕관을 쓴 몰약나무에 짖눌려 흐르는 피는 죽음을 이겨내는 치유의 피를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시로 왕관을 썼습니다. 죄로 얼룩진 영혼들을 정화하기 위하여 가시나무 상처에서 진홍색 피, 치유의 피, 정화의 피를 흘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