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부활제4주간 월요일 요한10,1-10 (20240422 부산협력)

jasunthoma 2024. 4. 20. 19: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당신을 정의하신 7가지 상징 (///목자/부활//포도나무/) 중에서 세번째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6,35.48.51)/ (8,12)/ (10,7.9)/ 목자(10.11.14)/ 부활(11.25)/ 길진리생명(14,6)/ 포도나무(15,1.5) 예수님께서 당신을 일컬어서 문이라고 하신 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옛 도성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한 이스라엘을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새로운 도성으로 들어가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당신을 가리켜 문으로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문은 옛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탈출기를 떠올려 주면서 동시에 바빌론 유배지에서 풀려날 때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한(BC13세기) 이후 약800년간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하여(BC 587) 바빌론으로 유배를 (1-BC 597, 2-587, 3-582)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이어 바빌론에서 두번째 종살이를 하게됩니다. 유배지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은 하루 빨리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가기만을 (키루스 칙령 BC 538)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던 이스라엘의 심정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 우리의 문이다” -> “나는 양들의 문이다” -> “나는 문이다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문이라는 은유는 예수님께서 에즈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성전 재건축 이야기를 떠올리시며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옛 도성안에 같혀 지내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즉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를, 구원자의 목소리를 듣고자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잃은 양들은 그들을 이끌어 줄 목자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처지에 있던 이스라엘의 심정을 아주 평화롭게 표현해 주고 계십니다. 양들이 목자를 기다리고, 목자가 양들을 기다리다가 서로 만나는 아주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서로에 대한 간절함이 배겨있습니다. 신랑은 신랑대로 신부는 신부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목자는 목자대로 양들은 양들대로 서로가 애타게 기다리며 새로운 삶을 희망하는 간절함이 배겨있습니다. 그러한 장면을 떠올리며 복음 본문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옛 도성에서 새 도성으로 들어가도록 예수님 당신이 목자가 되어 옛 도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면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목자는 폐허가 된 옛 도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이렇게 양들을 모두 옛 도성 밖으로 이끌어낸 다음 목자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릅니다. 그렇게 젖과 꿀이 흐르는 풀밭에 다다르면 양들의 목자는 이제 양들의 문이 되십니다. 그리고 양들의 문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문이 되십니다. 하늘나라의 문이 되십니다. 새로운 풀밭의 새로운 도성, 하늘나라의 도성이 목초지에 재건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풀밭은 노메인데 노메의 어원인 네모는 분배, 분할, 할당, 나눔, 이끌다, 간호하다, 돌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했던 선조들이 봉헌했던 첫 도성, 이스라엘의 성전 예루살렘과, 이어서 에즈라(BC 538-키루스칙령)/ 느헤미야(BC 445)가 재건축했던 예루살렘의 옛 도성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 당신의 성전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풀밭과 같은 나눔의 장소, 돌봄의 장소로서 당신 친히 양들을 이끄시고, 양들의 문이 되시어 새 도성을 완성하십니다. 그렇게 세워진 도성, 이 새로운 도성은 문이 되신 당신의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기에 완성될 수 있었고 또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목소리를 기다린 양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에 재건축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소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포로생활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어 하느님 나라의 자녀들이 될 수 있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아름다운 성전 예루살렘 성전을 염두해두면서도 당신의 성전은 그곳이 아닌, 그곳을 떠나서 풀밭으로 옮기려고 하셨을까요???

그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 이후, 그리고 키루스 칙령 이후 옛도성, 폐허가 되었던 도성에 도착했을 때에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이들이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합법적인 탈출이 아니라 허락 없이, 또는 동의 없이, 칙령 없이 탈출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도착한 그들은 먼저 도착했다는 이유로 주인 노릇, 왕 노릇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에즈라기는 그들은 성전 재건축을 방해했다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들은 에즈라(BC 538-키루스칙령) 때부터 방해를 하기 시작하여 느헤미야(BC 445)가 성전재건축을 완성할 때까지 약 100년간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예수님시대에까지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그 예언자다, 내가 왕이다 라며 그들만의 종교를 만들고 그들만의 학교를 만들고 그들만의 국가를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참 목자, 참 예언자, 참 왕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곳조차 없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것을 허물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보이지 않지만 성벽이 둘러쳐지고, 세우지 않았지만 성전이 세워지고, 소리내어 외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더 우렁차게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찬양이 울려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그러한 기쁨, 내적인 부활의 기쁨을 살고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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