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야기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에 관하여-

jasunthoma 2024. 1. 7. 14:05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에 관하여-

20051107 김용석

세상을 따라 살기가 가장 쉬운 상태는 신을 따라 살기가 가장 어려운 상태며 그리고 이 반대의 경우도 진리이다. 인간이 세속을 좇아 살아가려면 종교생활처럼 어려운 것이 없고, 세상을 따르면 고관이 되거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그런 것에 집착하면서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면 그런 것에 흥미나 애착을 느끼지 않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이로써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주적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향하도록 연약함을 주시고, 늘 이끌어 주시기에 참담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당신을 찬미할 수 있는 위대한 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자기의 비참을 인식하는 데 있다. 나무는 자기의 비참을 모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비참을 깨닫는 일은 비참한 일이지만 위대한 일이기도 하다.”

우주를 비춰 주는 영원한 등불처럼 놓여 있는 저 찬란한 광명을 보아라. 천체가 그리는 광활한 궤도에 비하면 지구는 하나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음을 생각해 보아라. 그러나 이처럼 광활한 궤도도 천공(天空)을 회전하는 모든 천체에 둘러싸인 궤도에 비하면 아주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경탄하라.” 파스칼은 인간의 끝없는 탐구 정신과 주님을 향한 그리움은 인간을 주님이 창조하신 모든 조물들 중에 가장 위대한 피조물임을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아주 작은 곳에서 온갖 죄악을 지으며 살아가는 비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이러한 보잘것없으면서도 귀한 존재인 인간임에 놀랄 뿐이다. 온 우주에 비하면 이처럼 보잘것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어쩌면 생각은 그리도 깊이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러한 능력조차도 애당초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좁은 방에 앉아서, 혹은 성당에 앉아서 교회를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고, 우주를 생각하며 모든 공간적 경계로부터, 시간적 경계로부터,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빛보다 더 빠른 움직임으로 사색하며, 주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과 동등하게 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금수와 같은 것일까? 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가!”

불꽃은 공기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를 알려면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은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도움을 주고받으며 간접적으로 되고, 직접적으로도 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가장 멀리 있는 것이나 가장 상이(相異)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을 서로 결합해서 서로 의지되어 있으므로 전체를 모르고 부분을 안다는 것은 부분을 모르고 전체를 알려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의 한계로 전체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도저히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문이 들 뿐이다.

그렇다고 부분을 면밀히 알지 못하고 전체를 말하는 것을 지지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으니 그저 구조적인 방법만을 전체적으로 아는 것에 국한시켜 놓은 채 이렇다 저렇다 할 가능성만을 제시해 놓고 마는 것은 아닐까? 피조물의 부분 부분은 많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은, 그 부분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은 그 자신에 있어서 자연 가운데 가장 경이에 가까운 대상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가 무엇이고 정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육체가 어떻게 정신과 결합할 수 있느냐는 것은 더욱더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인간존재의 본질이다. 또한 정신이 육체와 결합하는 방식을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바로 그것이 인간인 것이라고 했다.

그 전체라는 것이 인간이 대면하는 모든것이라고 했을 때 정해진 시간 안에서 생로병사를 겪게 되고, 정해진 땅에서 이탈할 수 없는 제한적인 피조물로써 인간은 도저히 모든 부분을 이해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렇듯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알고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하느님 앞에서, 고독한 한 인간으로서 아무런 욕심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깨끗하게 비워진 마음으로 창조주를 그리워하게 되고 모든 연관성을 관상할 수 있는 이치일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일은 부()를 얻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부를 가지는 게 정당하다는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그 변덕 많은 생각밖에 갖고 있지 않으며 부를 확실히 가질 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움으로써 가지게 되는 무한한 부를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은 늙도록 자의(自意)가 아니게 아들이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부를 축척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대를 잇지 못하고 죽을 나이에 가서야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유목민으로서 보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있는 가장 큰 비열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건강하고 안락을 누린다 해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을 해서 자손이 무수히 불어나는 것을 큰 복으로 삼기도 하지만, 사실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에게서는 늘그막에 가서 죽음을 보기 전에 아들을 낳는 것이 더 이로웠을 것이다. 여기서 물적인 부만을 생각하기 쉬우나 그 이면에 영적인 부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상의 모든 부()는 힘들여 움켜쥠으로써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쥔 것을 놓음으로써, 차 있는 것을 비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무찌르기 위해서 온 우주가 무장하지 않아도 된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을까? 피조물 중에 가장 약한 존재로 만드시고 거기에다가 아주 강한 영혼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그 영혼에 의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어서 그에게서 생각하는 힘을 느낄 수가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그와 다르다. 하루에도 수백 번 생각이 바뀌고 금방 다짐한 생각도 흔들린다. 즉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먼저 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만다. 결국은 이렇다 할 윤곽도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그렇게 흔들리는 생각이라 하더라도, 보잘것없는 생각이라 할지라도 생각하지 않는 우주보다 생각하는 인간이 더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우주가 인간을 무찌른다 해도 인간은 자기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주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인간의 존엄성은 생각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고에 의해서 자기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다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잘 사고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의 근본이다.”

어찌하여 나의 지식은 제한된 것일까? 왜 나의 신장은? 또 나의 수명(壽命)은 왜 천년이 아니고 백 년인가? 무슨 까닭으로 자연은 나에게 이런 수명을 준 것일까? 무한에서 보면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나을 것이 없으므로 다른 것을 버리고 어느 하나를 택할 이유가 없었을 터인데 이 수를 택하고 다른 수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가 일 년 같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루가 쏜 살 같다고 한다. 왜 그런 느낌으로 자신의 상태를 고백할까? 삶의 고통과 즐거움의 작용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하느님께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같다고 했으니 인간의 수명이야 아무려면 어떠할까.

상상력은 환상적 평가에 의하여 작은 사물을 확대하여 우리 영혼을 가득 차게 한다. 그리고 겨눌 수 없는 오만(傲慢)으로 위대한 것을 대단찮은 것으로 축소시켜 자기 척도에 맞도록 한다. 신에 대해 말할 때가 그렇다.” 바다의 물 한 방울만큼이나 작은 영혼도 영혼으로 인정해 주시며, 혼탁해 질대로 혼탁해진 정신을 애써 당신께로 향하는 한 인간을 받아 주시는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릴 뿐이다. “자애(自愛)와 인간 자아(自我)의 본성은 자기만을 사랑하려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면 인간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결함(缺陷)과 비참에 가득 차 있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는 위대하게 되기를 원하지만 또 자신의 미소(微小)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려 하면서도 자신의 비참을 목격하는 것이다. 완전하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의 불완전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자기의 결함이 남들의 혐오와 모멸(侮蔑)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그가 당면한 이 곤란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不正)하고 가장 죄 많은 정욕을 그의 마음에 일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책하고 자기의 결함을 깨닫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하여 철저한 증오(憎惡)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진실을 없애버리려 하지만 진실 그 자체를 파괴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의식과 남의 의식 속에서 힘이 자라는 데까지 그것을 파괴한다. 그것은 자기 결함을 남과 자기 자신에게까지 감추려고 갖은 노력을 하며 그 결함을 많이 지적하거나 남이 보는 것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실을 미워하며 진실을 말하는 것도 미워하며 남이 우리 편을 들어 우리 자신을 기만해 주는 것을 좋아하여 사실대로의 우리와는 달리 남에게서 평가받기를 바라는 게 사실이 아닌가?” “숨은 미행(美行)은 가장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더러 역사나 전기에서 보면 나는 아주 기뻐진다. 그러나 그것이 알려진 것을 보면 결국 완전히 감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행위들을 감추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누설되었다는 것은 결국 그 전부를 망치고 만 셈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감추려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에는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드러나게 행동함으로써 받는 칭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일의 노예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출세하는 행운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진실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그 사람의 호의를 얻으면 훨씬 유리하고 미움을 사면 아주 위험할 경우에 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의 호감을 받으면 어떤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유리하지만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는 불리한 법이다. 그 사람은 미움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후(王侯)의 측근자들은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왕후의 이익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더 귀중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해치면서까지 왕후의 이득이 되도록 하려 하지는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고독한 사도(師徒)의 임무에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로움과 싸우지도 않을뿐더러 고독을 즐기지도 못한다. 그들은 남겨진 이득 속에서 뒹굴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위장(僞裝)과 허위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딴 사람이 그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가 남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도 피한다. 이와 같이 공정과 도리(道理)에서 떨어져 있는 이 모든 성향(性向)은 인간의 마음속에 태어날 때부터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악덕 안에서는 위대한 사람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지 못한다. 사람은 위인(偉人)이 민중에게 연결된 그 끝에서 위선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난 위인이라도 어떤 점에서는 가장 열등한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안에서 어떤 노숙자가 앉아서 코를 후비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주위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기를 꺼려한 모양인데 마침 내가 가서 앉았다. 그 노숙자는 코를 후벼서 촉촉한 코딱지를 손바닥에 묻혀서 비벼서 떨어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행동은 내 방 안 책상머리에 앉아서 내가 즐겨하던 행동이어서 더욱 쑥스러웠다.

비참(悲慘). 솔로몬과 욥은 인간의 비참함을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잘 말한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솔로몬은 경험에 의해 쾌락의 공허를 알았으며 욥은 재난의 현실성을 알았다.” 행복과 불행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있다고 본다. 이 실재 현실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감각이 사라진다면 행복도 불행도 느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재로 고통을 받은 욥의 심정을 무관하게 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나가는 시간 선상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업적임을 깨닫기를 바랄 뿐인 것이다. 애벌레가 기어다니다가 매달리고 매달렸다가 날개를 다는 과정에서 어디를 고통이라 하고, 어디를 즐거움이라 할까?

사람들은 종교를 경멸한다. 그들은 종교를 싫어하고 종교가 진실할까봐 두려워한다. 이것을 고치려면 우선 종교가 이성(理性)에 어긋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존경해야 할 것임을 알려주고 또 그에 대하여 경의를 표시하게 하여야 한다.” “종교를 공격하기 전에 적어도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성서의 어느 한 편을 읽는 데 여러 시간을 바치고 신앙의 진리에 대하여 성직자들에게 질문도 하며 그것으로써 진리의 여구에 있는 힘을 다했다고 믿어 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서적을 읽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노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그러나 그런 게으름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문제로 의혹에 빠져서 진지하게 고뇌하여 그것을 큰 불행으로 생각하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일도 사양치 않고 그 연구를 중요하고도 진실한 과제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 아무런 사색도 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나는 전혀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현실적이며 무서운 것은 없다. 되도록 용감하게 행동해 보라.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애를 기다리는 마지막인 것이다. 이것을 잘 생각하고 현세(現世)에는 내세를 그리워하는 희망밖에는 행복이란 없으며 인간이란 내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행복해지며 영원에 관한 완전한 확신을 갖는 자신에겐 벌써 불행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영혼에 대하여 아무런 광명도 가지지 않는 자에겐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 말해 보라.”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처럼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이 세상을 떠나면 허무 속에 떨어지거나 혹은 분노와 신의 수중에 떨어지리라는 것밖에 알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에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많은 것을 의심하게 되어 믿음이 없어질 지경에까지 온 것 같다. 다만 내가 눈 뜨기 전에 못 보았다고 의심하고, 내가 눈 감고 난 후에 못 볼 것이라고 의심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결과에 봉착하고 말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수 없다면 적어도 진실한 인간이라도 되기를 바란다. 결국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인간은 두 가지 종류밖에 없다. 그것은 신을 알고 있으므로 마음을 다하여 신을 받드는 자와 신을 모르기 때문에 온 마음으로 신을 구하는 자인 것이다.” “신의 인식 없이 행복할 수 없고 신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사람은 보다 더 행복하게 되며 궁극의 행복은 신을 확실히 아는 데 있다는 것. 신을 멀리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불행하게 되고 가장 큰 불행은 신을 가장 모르는 데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의심하면서도 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다.” 인간이 비참하다는 것은 알고도 믿지 않는 데에 있고,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모르고도 믿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애의 짧은 기간이 그 전과 후의 영원 속에 흡수되고 내가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내다보고 있는 이 작은 공간이 내가 모르고 있으며 또 나를 모르는 무한한 공간의 넓이 속에 가라앉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나는 내 자신이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어째서 내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 있으며 그때에 있지 않고 지금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두었는가? 누구의 명령과 조치로 이곳과 이때가 내게 주어졌는가.” 잠깐 왔다가 사라지듯 떠나고 마는 세상을 생각하게 한다. 미천한 인간이 잠깐이나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느끼고, 그 품에 안겼다가 먼지로 돌아가니 허무하기보다 더 진한 감동과 감사와 흠숭을 드리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세례를 받고 신앙을 얻는 사람은 터어키인보다 그리스도교인에게 더 많다. 요컨대 일단 정신이 진리가 어디 있는가를 파악한 이상 시시각각으로 달아나려는 이 신앙에 우리를 매어 놓고 침투시키려면 습관의 힘을 빌려야 한다.” 철없던 어린 시절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하나는 신을 발견하여 이를 섬기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를 애써 추구하는 사람들, 나머지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예수그리스도와 성()바울은 정신의 질서가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따뜻하게 해주려 했지 가르쳐 주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 내 판단력과 기억력 때문에 사랑한다면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장점을 잃을 수는 있어도 내 자신을 잃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라는 것이 육체에도 영혼에도 있지 않다면 어디에 있을까? 또 그런 것들은 멸망할 수 있으므로 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지 않지만 그런 성질들 때문이 아니라면 어찌 육체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면 인간은 어떤 사람의 영혼의 본질과 그 속에 있는 몇 개의 특질을 추상적으로 사랑하려는 것일까?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또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 자체를 사랑하지 않고 그 특질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무색(無色)할 정도라고까지 할 정도다. 특질이 있는 사람, 특성이 있는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개성이 있는 사람들이 나서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자는 미친 바보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친 바보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벌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그런 미친 바보에까지 복종하게 하는 신의 질서를 존경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행은 천사를 흉내 내고 싶어 하면서도 짐승을 흉내 내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모든 것이 한 모양으로 움직일 때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배를 타고 있을 때가 바로 그렇다. 모든 사람이 방종한 생활에 젖어버렸을 때는 아무도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멈춰선 것이 고정된 점처럼 다른 것의 움직임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둘이 나란히 걸으며 로사리오를 바치는 것은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란히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성과 정욕의 내적 투쟁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을 두 파로 갈라놓았다. 한 편은 정욕을 버리고 신이 되기를 원하고, 다른 한 편은 이성을 버리고 짐승이 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성은 여전히 정욕이 비천하고 부정한 것이라 하여 정욕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를 어지럽히며 정욕은 그것을 버리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많이 윤택해져서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어지는 것 같다. 서로가 함께 나란히 걸을 뿐인 것이다.

나는 인간을 칭찬하기만 하는 사람이나 인간을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일생을 향락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을 모두 비난한다. 그리하여 나는 괴로움을 극복하면서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람만을 인정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의 행위는 모두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목을 매어 자살하려는 사람까지도.” “신만이 인간의 진정한 선()이다. 인간이 참된 선을 잃어버린 이래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똑같이 선으로 보였고 선, 이성, 자연에게도 다같이 어긋나는 데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선으로 보이게 된 것이다.”

다른 어떤 종교도 인간이 가장 훌륭한 피조물임을 알지 못했다. 인간의 우월성을 충분히 인식한 사람들은 인간이 원래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비천한 감정을 비급하고 배은망덕한 것으로 보았고 또한 이런 비참을 생생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감정을 쑥스러운 오만 때문에 생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외의 그 어떤 종교도 인간 자신이 바로 증오해야 할 존재임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자기를 증오하고 참으로 사랑할 만한 존재를 찾고 있는 자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겸손한 유일신(唯一神)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곧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남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조차도 부당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사려 깊고 공평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 우리 자신과 남들을 잘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대하여 이런 편견을 가지지는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편중되게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즉 날 때부터 합당치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자신을 향하여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질서에 위배된다. 우리는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여 비천한 존재가 되든지, 자신을 버리고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써 귀한 존재가 되든지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파스칼이 전해준 행복은 우리들 내부에도 또 우리들 외부에도 없다. 그것은 신에게만 즉 우리의 내부와 외부에 모두 있다.”는 말을 끝으로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이 인간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단지 하느님 앞에 섰을 때에 인간으로서 비참해지기도 하고, 위대해지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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