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야기

사람의 아들 - 이문열

jasunthoma 2008. 12. 9. 15:44

세상에는 은총을 입은 사람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은총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라는 성경말씀대로 숨을 쉬고 있으면서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은총도 육체적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아주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고마움을 느끼고 감사함을 고백할 때에 이미 은총을 느끼고 있으며 은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때때로 혹독한 시련 속에서 세상을 비관하며 아파하고 그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종교를 찾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적에 이사를 자주 다녔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어느 시골 농촌에 머물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아버지께서 중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후로 어머니께서 고생을 하시며 자녀들을 힘겹게 키워가고 있을 때였다. 축사처럼 길쭉한 건물을 칸칸이 막아서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그 집은, 굳이 말하자면 요즘에는 보기 힘든 농촌형 연립주택이라고 생각된다. 그 집안에는 장독대를 둘러쌓고 있는 담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늘 고양이 새끼 한 마리가 올라가 잠을 자고 있었다. 중병으로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시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여러 가지로 고생을 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담장위에 있는 저 주인 없는 고양이를 잡아다가 길러서 장에 내다 팔아 강아지를 사고, 그 강아지를 길러서 장에 내다 팔아 염소 새끼를 사고, 그 염소를 길러서 장에 내다 팔아 송아지를 사고, 그 송아지를 길러서 큰 목장을 만들어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편안히 모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갈 나의 어린 시절의 희망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는 미약하지만 훗날에는 크고 깊고 넓어지리라는 막막한 이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를 끓이셨는데, 나는 방문을 열고 부엌을 들여다보며 즐거움에 차서 수제비가 다 되기를 기다리며 침을 삼켰던 기억이 난다. 그러한 도움을 베푼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이다음에 성장하면 꼭 갚겠노라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사람의 아들’은 사회적인 면을 다루면서도 종교적인 면을 다루는 것 같다. 사회적인 면은 밝고 명랑한 현실보다는 어둡고 추운 배경이 짖게 베여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는 실천과 정의를 통해서 밝고 명량한 사회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종교적인 면은 은총과 기쁨이 충만한 모습보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한 인간의 방황과 자아상실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시기와 모함 속에서 의로움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요섭은 진리를 찾아 나서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는 괴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런 인간의 모습은 선의 실천과 자기절제를 통해서 주님의 은총을 느낌으로써 완성되어야 하는 것 같다.

 

인간의 삶의 바탕은 사회라는 울타리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로인한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는 빈부의 격차도 있고, 정신과 육체의 고통스런 몸부림도 있을 것이다. 조동팔이 추구하고자 했던 정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국한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홀로 정의감에 불타올라 불을 향해 날아가는 나방처럼 자신을 희생하고야 마는 지극히 개별적인 의로움이었다고 본다. 불의한 사회적 구조를 개조해서 모두를 구제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라도 정의를 실천하여 우선 한 명이라도 가난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말에는 공감이 간다. 그 한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이웃이 될 수도 있는 희망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이 먼저는 인간에게서 왔다고 느껴지기에 다소 불완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종교적인 가르침에 바탕을 둔 믿음을 통해 바라본다면 더 큰 희망으로 작용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불행하게만 보고, 부유하게 산다는 것을 행복하게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 조동팔과 민요섭이 나서서 의로움을 실천한 개인적인 행위들이 다소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이 일생에 걸쳐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살아온 세월을 되새겨 본다면, 시련과 고통의 시간보다 기쁨과 행복의 시간이 더 많았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일들 중 기뻤던 일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떠올려 보려면 선 듯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의 기억력은 고통과 더 친밀하게 연결 되어 있는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의 노력은 때로는 비관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꼭 그것만이 전부라고만 볼 수도 없다. 괴로웠던 시절에 받은 상처가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행복해지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의롭게 살고 있다. 물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오는 고통도 있지만, 전반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평화롭게 살아간다. 때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수모도 겪지만 그러한 어려움을 통해서 훗날 얻게 되는 평안함도 그 이유가 충분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갖은 고통을 다 당하면 죽을 때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합당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처지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도와주려는 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마음은 누구를 속이거나 모함하지 못하는 연약한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며, 그렇게 도와주려 하면서도 항상 부족한 자신의 모자람을 탓하기에 부자들 보다 종교적 심성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하게 산다는 것을 행복하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편치 않은 마음에 있을 것이다. 부유하다는 것은 재물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비교적 많은 돈을 버는 데 있을 것이다. 조동팔의 부모님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리대금업자였다. 인간은 혼자서의 힘으로는 많은 돈을 벌수 없다. 그런데 이웃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면 그들에게 정당한 댓가가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조동팔의 부모님은 그 댓가를 가로챘던 것이다. 또한 그 부를 지속하기위해서 양심을 내팽개 쳐야하는 심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당대에 부를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는 가장의 아버지로서 대를 이어 부를 유지하기는 더욱더 쉽지 않을 것이다. 부의 대물림에 있어서 가족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부자들에게는 큰 아픔일 것이다. 모든 식구가 다 부유하지 못한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가장(家長)의 마음은 편치 않는 것을 넘어서 고통스러울 것이다. 부의 대물림에서 제외된 자식의 방탕함보다 그 부를 계속해서 물려주지 못한 가장으로서의 아픔이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물론 재물의 많고 적음뿐만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은총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도 격차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드리는 사람이 이웃을 위해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합당하게 볼 수 있듯이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선심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종교적으로 볼 때 그 행동이 진정으로 선한 일이라고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은총을 받은 사람의 도리로써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 의로운 일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이 벌어들여 많이 내어놓는 것을 가지고 의롭다고 할 것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종교를 잘못 이해하고 믿음을 잘못 받아들이면 기이한 상상에 빠져 행복한 삶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본문에서처럼 결코 성경의 내용을 가볍게 여겨 인간적인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신적인 것을 말씀의 육화로 잘못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의 내용 자체만 볼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 펼쳐진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만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드러난 계시를 기록하여 담아놓은 그릇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가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놓고 말씀의 육화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와 가난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내 마음 속에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분 짓는 그러한 이분법적인 생각으로는 만물을 조화롭게 이루시는 창조주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한 단면만을 보고 인간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듯이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살았던 곳곳에서 모든 종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종교만이 유일하고 올바른 것으로써 받아들여 타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 안에는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온 과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대다수의 생필품들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들임을 생각해 볼 때 한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웃의 도움으로 존재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도 서로 영향을 주었고, 그러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종교로 다듬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있어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은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은 정의와 불의를 떠나서, 가난과 부를 떠나서 온 인류에게 기쁨과 찬미를 가져다 줄 일이다. 유독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 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생각은 분명 그리스도교적 모순이 될 수도 있다. 가난한 나자렛에서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는 상징적 가난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한 생명이 한 개체로써 귀함은 장소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음을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아무리 외관상 추하고 열악한 환경에 비추어 예수님을 뉘어 놓아도 그 분 자체가 고유하고 귀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광채가 나는 것이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불의하거나 정의롭거나한 것은 사람이 가진 고유한 심성이 아니다. 그것은 불의한 환경, 가난한 환경, 정의로운 환경, 풍요로운 환경에 영향을 받은 미약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은총을 입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진정으로 은총을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은총 속에 산다는 것은 내가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 속에서 서로 도와주며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또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