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웅인 이순신장군이 살았던 시대는 조국의 운명이 기울어졌던 만큼 정치적으로 충신은 없었고 암투만이 존재하는 비극의 시대였다. 누구의 간언도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던 문인들의 권력행보에 의해 뿌려진 비수에 걸려들지 않도록 처신해야 했던 불운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내분과 음모속에서 살아남아 나라를 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외침과 절규는 때로는 침묵속에서 자신을 갉아 먹는 겁쟁이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불안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직분을 묵묵히 다한 이순신장군을 좀 더 깊이 알고자 한다. 그러니 만큼 침묵으로 일관한 그의 공직생활을 거울삼아 공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 먼저 이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공직을 시작하고 20년이 지난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2번의 백의종군을 포함하여 15차례에 걸쳐 직책이 바뀐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중앙 관직에 발탁되더라도 이순신을 시기하는 무리에 의해 즉시, 변방으로 재임명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늦은 나이에 말딴 관직에 올라 20여년간 변방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로써 자신을 음해하려는 이들에게 비방의 말이라도 던져야 했을 법한데 이순신 장군은 묵묵히 정해준 관직에서 맡은바 임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점은 현시대의 공직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실천해야 할 덕목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절대로 가벼이여길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1572년(선조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훈련원은 조선시대에 무인을 선발하고 관리하는 관청인데 별과시험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시행한 시험이었다. 이순신은 무과 공부를 시작했다고 바로 합격하는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21세 때 결혼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무과 시험공부는 22세 10월부터 시작했다. 계속 문과 시험공부를 하던 이순신이 장가를 가더니 무과 공부를 선언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급작스럽게 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는 누구에게나 어렵다. 이순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순신은 덕수 이씨 출신이다. 시조는 고려 때부터 시작되지만 조선에 이르면서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순신의 고조부가 되는 이효조는 통례원 봉례 관직까지 올랐다. 통례원은 왕의 의전과 관련한 사무를 담당한 관청이다. 봉례는 정4품으로 지금의 정부 조직 부이사관 정도의 고위 관직이다. 이순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를 지냈다. 병조참의는 정3품으로 지금의 소장 정도 되는 계급이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성종 때 이거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순신의 증조부 이거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명함이 통할 정도로 유력자였다. 그런데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 때에 와서는 종8품으로 낮은 관직 봉사를 지내는데 집안 대대로 고위직을 역임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이다.
그것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와 토지 제도의 개혁을 요구한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에 몸담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중종 때 기묘사화(1519)가 발생했고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죽임을 당했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이러한 내력으로 관직에 있지 않았음을 유성룡의 <징비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 집안 사정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은 관직에 진출해 국가가 주는 보수로 생활을 하거나 농장을 경영하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농장은 부모한테서 물려받거나 사거나 개간하는 등의 방법으로 양반들의 차지가 되는데 이는 양반들의 지위세습을 의미했다. 이순신의 집이 있던 곳은 당시 최고의 권력가들이 모여 있는 고급 문화거리였다. 소비수준도 달랐을 것이고 그 경비를 유지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집을 서울에서 충남 아산으로 옮겨버렸다. 충남 아산은 이순신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곳이다.
조선 당시에는 처가살이가 흔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이순신의 어린시절을 기록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순신은 어렸을 때 영특하고 활달하였다. 그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놀 때에도 나무를 깎아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거리에서 놀았는데,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을 만나면 그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 군만을 막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전쟁놀이 중이라도 어른에게 대든 무례한 꼬마는 호되게 야단맞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만난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이순신은 동네 어른들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아이였다. 그때 집안은 몰락하여 관직에 없었지만 이순신의 할아버지는 조광조 등의 사림과 교유하다가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만으로 동네 어른들은 괜히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이순신의 무인적인 기질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발현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훗날 ‘7년 전쟁’ 때 꽃피는 이순신의 재능과 용맹은 어린 시절부터 있었음을 표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순신을 제외한 형제들(희신. 요신. 우신)은 공부에 별다른 자질을 보이지 않았다. 이순신도 22세까지 별다른 소득 없이 공부를 계속했다. 당시 문과가 무과보다 우대받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순신이 22세 되던 해까지 문과 공부를 하고 무과를 택한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순신이 무과를 선택한 단서는 이순신의 장인과 아내에게서 엿볼 수 있다. 이순신의 장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이었다. 아내는 방진의 외동딸이었다. 이순신의 집안은 결코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었다. 이순신이 나이가 들고 장성할수록 집안의 어려운 경제사정이 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가를 가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당시는 남자가 처가살이하는 것이 흔한 시대였다. 따라서 처가살이는 아닐지라도 장인 방진한테서 최소한의 경제적 도움은 받았을 것이다. 이순신은 혼인으로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된 샘이었다.
무과 시험은 책만 열심히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창을 휘두르는 것이 정식 시험 과목이었다. 따라서 최소한 좋은 말 한필과 쓸 만한 활과 창이 필요했는데 그의 장인 방진의 재력으로 해결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장인 방진은 무예가 뛰어났었는데 이순신의 훌륭한 과외교사로써 조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조언 등에 의해 무과 시험에 응시할 마음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순신이 결혼하고 무과공부를 시작한지 6년이 되던 해(28세) 8월에 훈련원 별과시험에서 떨어졌다. 달리던 말이 거꾸러져서 이순신이 떨어져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지만 몸을 추스르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부상한 다리를 싸맸는데 그 과감성에 시험관들이 놀랐다고 한다.
조선시대 무과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강서(講書)와 무예(武藝)로 나뉜다. 강서는 4서5경, 무경 7서, 기타 병서 중에서 각각 하나씩을 택일하고 <경국대전>을 보았다. 또 무예는 목전. 편전. 철전. 기사. 기창. 격구의 여섯 과목이 있었다. ‘7년 전쟁’의 여파로 나중에 조총 등의 과목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중 무예는 서서하는 활쏘기 시험이 있는데 나무로 된 화살을 쏘는 목전. 대롱살에 길이가 짧은 화살을 놓고 쏘는 편전, 쇠로 만든 전투용 화살로 쏘는 철전이 있다. 다음은 말을 타고 보는 시험인데 말을 달리며 활을 쏴서 둥그런 목표물에 맞히는 기사, 말을 타고 달리면서 두 손으로 긴 창을 휘두르거나 목표물을 맞히는 기창, 말을 타고 채를 이용해 나무공을 쳐서 점수를 내는 격구가 있다.
조선의 무과 시험 과목에서는 칼쓰기가 없고 활쏘기와 말타기였다. 칼쓰기를 중요시하지 않는 허점은 조일전쟁이 터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100여 년에 걸친 내전으로 칼쓰기에 상당히 능했다. 따라서 야전이나 거리가 좁혀져 백병전이 벌어지면 칼을 이용한 일본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졌다. 신립의 8,000여 기마병이 동원된 충주전투에서 대패한 것은 대표적이다. 하지만 조선군이 성과 같은 지형지물에 의지해 활이나 포를 사용한 진주성전투와 행주성전투에서는 이겼다. 일본수군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포를 이용해 원거리에서 전투를 수행한 이순신의 무적함대도 그러했다.
1576년(선조9) 32세가 되어서 식년무과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마절도사, 발포수군만호를 지냈다. 식년 무과시험은 3년마다 치르는 정기적인 무과 시험을 말한다. 여기서 병과 4등을 했는데 병과 4등은 합격자 중에 제일 낮은 서열로써 1차 시험인 초시 합격자들을 서울로 불러 2차 시험인 복시를 치른다. 복시에서 강서와 무예를 보게 해 28명 정도 선발하고 마지막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를 대상으로 고과 순위를 매기는 시험이다. 이 전시에서 성적을 매겨 1등에서 3등까지를 ‘갑’과라 하여 종7품, 4등부터 8등까지를 ‘을’과라하여 종8품, 병과는 9등에서 그 말단까지를 말하며 종9품으로 지금의 하사정도 직책이다.
첫 말딴 관직에 올라 동구비보권관이 되었는데 이곳은 이순신의 첫 근무지로 함경도 백두산 밑 동구비보의 권관이다. 동구비보라는 현재 북한의 삼수를 말한다. 흔히 ‘삼수갑산’이라고 하는 그 삼수로, 감산과 더불어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 벽지로 알려져 있다. 삼수는 세 강인 압록강, 삼수동수, 어면강이 모인다고 한 데서, 갑산은 산이 갑옷처럼 촘촘하게 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당시 삼수는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는 여진족을 막기 위해 초소와 봉수대를 설치한 국경 수비의 요새였다. 이 요새를 동구비보라 칭한다.
1582년 1월 발포 만호직에서 파면되어서 그해 5월 훈련원 봉사로 복직하는데 이때 이조판서 이이가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보기를 청했지만 이순신은 ‘같은 성씨라는 점에서는 만나도 무방하다 하겠으나 그분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처지니 만나보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그 후 1583년 7월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용의 군관으로 발탁되고 1583년(선조9) 10월 건원보권관으로 부임하자 여진족의 침입이 있었고 이순신은 여진족의 호족인 울지내를 유인한 후 복병으로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과로 부임 한 달 만에 서울로 재진입하면서 훈련원 참군이 되었으나 아버지 이정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듣고 3년상을 치르고 사복시 주부로 복직하게 된다. 그러나 16일 만에 조산보 만호로 임명됐다. 조산보는 함북 북동단에 있는 경흥에서 약간 떨어져 설치된 국경 수배대지역이다. 1587년 가을 제2차 여진족전투가 발생했는데 아군 11명의 병사가 살해되고 군민 160여 명 납치되고 말 15필을 약탈당했다. 이 패전의 문책으로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제2차 여진족 전투가 일어나기 전 이순신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에게 병력 증원을 거급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적은 병력으로 대규모 여진족에게 납치된 군민 60명을 구출하기도 하지만 성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응징으로 1588년 1월 14일 여진족 정벌에 나선다. 함경북병사 이일이 2,5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새벽에 두만강을 건너 시전의 여진족을 급습하여 가옥 200여 채를 불사르고 380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순신도 이 작전에 참전했는데 그 공으로 백의종군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1589년 2월 (45세) 전라순찰사 이광의 군관이 되었고 1589년 11월 선전관으로 서울에 입성했다. 선전관은 왕명을 전달하고 국왕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는 곳이다. 1589년 12월 전라도 정읍 현감으로 발탁되었는데 이때 무려 24명의 부양가족이 뒤따랐다고 한다. 어머니와 큰 형수, 작은 형수, 그리고 10여명의 남자 조카와 4명의 여자조카가 있었으며 제수도 부양했다. 이처럼 부임하면서 대 식솔을 거느리고 부임하니 세인에게 식구가 많다고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모두 검소하고 청렴하게 생활해 그 비난을 일소시켰다.
1590년 7월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는데 병마첨절사는 종3품인데 사간원 대신들의 반대로 취소되고 곧이어 1590년 8월 평북의 만포진 병마첨절사로 재차 임명되었으나 대신들이 반대해 또 무산되었다. 1591년 2월 진도군수에 임명했으나 그곳에 부임도 하기 전에 승진하여 완도를 책임지는 가리포 수군첨절제사로 전직되었다. 그러나 수군첨절제사로 부임하기전에 또한번 승진하여 마침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같은해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5년 뒤인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때 원균의 모함으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에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 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 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같은해 7월 그의 후임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은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전쟁 중에 그가 지휘하지 않은 수군들의 잘못된 행위를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조선 수군들은 물 위에 떠다니는 아군들의 시체를 갈고리로 찍어 건져 올려서 갑판 위에서 목을 잘랐다. 목을 자르기 위하여 작두를 따로 배에 싣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들은 다시 물에 던져졌다. 그 머리 숫자로 지휘관들은 승진했고, 장려한 수사로 넘실거리는 교서를 받았다.
조정으로부터 출정명령을 어겨서 체포되기 몇 달 전인 병신년 초겨울에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권율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통제영까지 이순신을 찾아왔었다. 조정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서 부산으로 진공하게 되어있는데, 함대를 이끌고 부산 해역으로 나아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적을 요격해서 가토의 머리를 조정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때 권율은 이 작전이 조정의 전략이며 도원수의 지시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그때 다만,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해 주십시오,라고만 대답했다. 권율은 서둘러 돌아갔고 이순신은 함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반간(反間)들로부터 입수했다는 조정의 정보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부산 해역의 연안 포구와 섬들에 적들은 거대한 군비를 쌓아놓고 있었다. 그 섬들 사이로 함대를 이동시키자면 후방과 측방이 모두 위태로웠다. 겨울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 그 물결높은 바다위에서 며칠이고 진을 펼치고 언제 올지 모르는 적을 기다린다는 것은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조정은 작전 전체의 승패보다도 가토의 머리를 간절하게 원했다. 가토는 임진년 출병의 제 1진이었다. 임금은 가토의 부대에 쫓겨 의주까지 달아났었다. 임금은 가토의 머리에 걸린 정치적 상징성에 목말라 했다. 이순신은 임금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함대를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순신은 즉각 기소되었다. 권률이 기소했고 비변사 문인관료들은 이순신을 집요하게 탄핵했다.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는 동안 그는 자신을 기소한 자와 탄핵한 자들이 누구였던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순신은 정치에 아둔했으나 자신의 아둔함이 부끄럽지 않았다.
원균의 삼군 수군이 전멸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을 풀어주었다. 이순신은 12척의 수군 병력으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수군 병영을 공사하고 있는데 임금이 보낸 선전관인 이원길이 병영 막사 공사장까지 이순신을 찾아 왔다. 여러 가지 조사를 하고 돌아 간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을 받았다. 도원수의 행정관이 면사첩을 들고 왔다. ‘면사’ 두 글자뿐이었다. 명랑해전의 승전에 관한 다른 문구도 없었다. 그는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했으며 임금의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은 죄인이니 그 죄에 대하여 죽음을 면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면사첩을 받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순신은 ‘면사’ 두 글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죄를 사면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살아가면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산다면 무능한자 취급을 받거나 아둔한자로 따돌림 당하기 쉽다. 누구든지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면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무작정 감정적으로 돌파한다면 출구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혼란스러울 때 침묵은 소중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침묵 중에 진실을 볼 수 있고 침묵 중에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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