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와 성경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될 모든 어려움에 궁극적인 답을 제시해 준다. 인생에 있어서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이 바로 논어와 성경이다. 인간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물질적인 보화를 주는 것 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러한 가르침을 동양에서는 논어가 대표하고 서양에서는 성경이 대표한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땅에서 사는 인간이 하늘을 바라보고 그 길을 동경하게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지 크게 경이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런 가치를 지닌 경전으로서의 가르침에 있어서 두 경전의 유사한 점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음미함으로써 그 근원이 하늘에 있고, 땅에 있고,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살아가면서 좀 더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면 길(道)과 진리를 구하지 않고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위로부터 빛과 생명으로 오신 그분을 맞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하고, 모든 은총과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시작 된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올바른 방향성을 지니게 된다. 논어는 그 길을 인간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제시한다. 이것을 논어는 세단계로 설명하는데 첫 단계는 학이시습의 즐거움으로서 이것은 도(道)와 진리를 체득해 나가는 구도(求道)의 과정이다. 두 번째 단계는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모여와 기쁨으로 함께 하는 즐거움이다. 세 번째 단계는 남을 탓하며 화낼 필요 없이 그 진리 안에 담겨진 은총과 기쁨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배움을 듣고 그 뜻을 마음에 새기면 나로부터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공자가 말한 하늘은 환경으로 있는 자연을 가리키지 않는다. 나와 하나가 된 자연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하늘을 원망하지도 탓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충서(忠恕)의 설명에서는 충은 중(中)을 지닌 마음의 중심으로 이해되고, 서(恕)는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이해되어 인(仁)을 설명한다. 그러나 어떤 인격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모욕과 박해를 받아가면서까지 원수를 용서하라는 엄청난 범위의 사랑은 논어에서 만큼은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유교가 지닌 종교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유교의 충서가 제시하는 경지에 이르지도 못하면서 늘 그리스도교의 극히 높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육체적 죽음 후에 다시 생명을 회복하여 살아난다는 부활은 인간의 이성이나 인지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신앙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죽음에 대한 극복이 육체적인 죽음을 수용한 체 진리와 하나 되어 정신적 차원에서의 승리를 추구한 점과 다르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살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 공자가 가르쳐준 삶과 죽음의 의미와 예수가 나타내 보인 죽음과 부활은 결코 옛날 얘기로써 있지만은 않다. 지금 이 시간 일어나는 ‘살고 죽는 일’이요. ‘죽고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이루고 완성시킨 것은 자신의 모두를 봉헌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였다. 공자도 자신이 깨달은 천명을 실현하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였다. 예수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과 공자에 있어서 천명이 중요한 것은 두 분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절대적 진리와 만나고 하나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비워야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공자가 추구했던 천인합일의 경지는 하늘과 하나 되기 위해 하학이상달하는 것이었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학이상달은 하나의 종교적 사건이요 신비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학은 하느님이었던 그가 인간이 되어 겸손되이 세상에 온 사건이며 여기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가 드러나고 시작됨을 의미한다. 상달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여준 여정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공자는 죽음을 참으로 태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표현했다. 사실은 그 이상의 사태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위안 받기를 원할 것이다. 자신의 사명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청하지도 않은 죽음은 속절없이 다가오고 그러한 현실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 아닐까?
육신의 짐을 벗는 순간 예수가 남긴 “다 이루었다”는 말은 죽음의 참다운 의미를 알게 해 준다. 삶의 짐을 내려놓는 시점에서 “다 이루었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예수의 완성된 삶의 모습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 진다. 공자는 낙담의 순간에도 ‘하늘은 알아 줄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성실성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유교사상에 의하면 인간이 죽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바로 공(功)과 덕(德)과 언(言)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세 가지를 통해서 조상, 또는 후손들과 연결되니 자신의 존재나 생명이 역사 안에서 영원히 남는 길은 이 세 가지를 통해서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도덕적영속성’이라 부른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는 ‘지금’과 ‘우리 죽을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도록 전구한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두시기가 하나로 합쳐진다. 즉 지금이 바로 죽을 때인 것이다. 늘 마지막인 것처럼 그리고 언제 그 분을 만나더라도 두렵지 않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깨어 기다리는 사람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새 세상에서 새 생명을 누리면서 행복과 평화도 함께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마지막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유념해야 할 문제다. 모두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만족하며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이상인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떠돌며 정치적 신념을 설파했다. 공자가 정치론을 펼 때 그 바탕으로 삼은 것은 ‘정치란 바로잡아 가는 것 (政者 政也)’이라는 명제다. 법이나 형벌로 다스려 백성들이 두려움에 억지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 백성들이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팔조목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을 보아도 그렇다. 제가에서 치국, 평천하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치적 이상은 모두 수신을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공자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권위와 권한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권한의 본질이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정치 권력구조를 뛰어 넘는 위계질서였다.
공자와 예수는 거짓을 미워했다. 그것도 비슷하지만 아닌 것을 아예 아닌 것보다 더 미워했다. 공자는 “나는 비슷하면서 아닌 것을 미워하노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벼 싹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말재주가 있는 자를 미워함은 의(義)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말 잘하는 입을 가진 자를 미워함은 신(信)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함은 정악(正樂)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요, 향원을 미워함은 덕(德)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해서이다.”고 했다.
그래서 유학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늘 떳떳함을 간직하는 것(動靜有常), 혼자 있거나 여럿이 함께 있거나 늘 같은 태도를 지니는 것(獨衆如一),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言行一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知行合一)이며 결국에는 근원적인 진리를 대면해도 부끄러움이 없어 그것 자체와도 하나가 되는 진실하고 순수한 경지(天人合一)를 꿈꾸는 것이다.
언행일치는 자신의 삶을 이루어나가고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 모습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감동한다. 성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울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감동과 결심이 구체적 실천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공자도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고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완강히 거부하는 것도 아니면서, 또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런 결단 없이 엉거주춤 서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실천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른다고 해놓고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자도 예수도 구제할 방도가 없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해 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여러분도 해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공자의 애인(愛人)은 곧 서(恕)라는 가르침으로 어떤 물질에도 구애받지 않고 참된 진리에 맛들이며 살아가는 것을 도(道)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 고통을 동반하는 길, 제 살을 깎아내어 수척해지는 길, 죽을 때까지 도를 수행해야 하는 길을 가야하는 것은 죽을 때에 가서야 도를 실천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死而後已) 있기 때문이고 죽는 날에 그리스도인은 성사적인 삶의 끝을 맞이하여 세례로 시작된 그의 새 생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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