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이 소설 <<이방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소설에 있어서 인생을 즐기는 이방인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듯하다. 그렇게 접근하게 된 계기는 주인공인 뫼르소의 내적 자유로움에 그 근거를 두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뫼르소는 진정한 자아 존재를 이방인 이라는 명제 속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대 자연 안에 초라한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이방인, 사회에 대한 이방인, 가족에 대한 이방인, 애인에 대한 이방인, 친구에 대한 이방인, 부부에 대한 이방인, 그리고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은 이 소설이 끊임없이 제기하고자 하는 화두로 다가온다. 이러한 물음들은 진정한 이방인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이며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 그의 권리이자 권한이다. 언듯 생각하기에 이방인이란 어색함, 정색함, 고립됨, 긴장됨과 같은 느낌으로 인식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러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특히 사랑의 감정은 영적인 것이며 이방인으로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뫼르소의 생각인 것 같다. 그러니 뫼르소에게는 애당초 누구를 사랑한다는것은 무지의 감정일 뿐이며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조차 인간적 행위로는 드러내어 완전하게 보여줄 수 ㅇ벗다는 것이다. 즉 유희하는 이방인의 영혼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도식이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혼의 유희다. 뫼르소는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상념속에서 영혼의 숨결을 느끼며 그 영혼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맡기는 삶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 그의 삶의 빈 공간을 어떻게 채워 갔는지 본문을 통해서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아주 유능하지는 않지만 회사를 무난히 다니고 있으며 그러던 중에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게 된다. 물론 어머니와는 떨어져서 생활해 오던 터라 임종 이전에는 어머니와의 연락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서술하기에 모자 관계가 그다지 애정에 넘치는 관계는 아니었는 듯 하다.
뫼르소는 유하하는 이방인으로서 한 시대를 살았다. 그는 코믹하고 방탕스럽게 인생을 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알고 있는 인물로서 그저 자신 앞에 펼쳐진 현실에 순응하며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나자 피로에 지치긴 했지만, 밀려드는 피로에 먼저 잠을 청하긴 했지만 그로부터 무한한 해방감을 느끼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듯이 내일에는 다시 내일 일이 시작된다고 자부하며 결국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솔직한 인물로 묘사된다.
어머니의 시신을 보기를 거부하고, 영안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즐기며,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거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을 흘린 것은 양로원에서 함께 지내온 늙은신 어머니의 친구였다. 뫼르소가 눈물이 없었다고 하여 그의 감수성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는 단지 자신 외에 모두에 대하여 집착하지 �으며 타인을 자기의 감정으로인하여 설득당하기를 원치 않았을 뿐이다. 자기의 감정은 자기 자신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해준다고 생각하지만 뫼르소에게 있어서만은 그러한 생각은 철없는 생각이다. 나 자신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와 나를 나이게끔해 주시는 유일하신 분과의 관계에서만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위로만이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잇으며 기쁘게도 할 수 있고 슬프게되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가끔 자기 앞에 펼쳐진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보다 이를 거부하거나 자기 처지에 맞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경향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뫼르소는자기 위주로 이끌어 가려는 선동적인 폭력 행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태도도 볼 수 없다. 타인을 이해시키기보다 나 자신의 스스로의 만족을 통하여 현실을 즐겼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세상에 대한 비관한 회의주의자가 아닐 것이며 오히려 침묵하는 형이상학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세상만물과 인간관계가 이해하기 힘든 복잡하고 아리러니컬한 점이 다분하지만 그러한 상황에 맞서 투쟁하며 정렬을 불 사르는 것만이 세상을 이기는 행위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뫼르소는 세상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아는 고독한 순례자와 같은 목적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진정한 순례자는 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또한 현실을 외곡하지도 안흔다. 있는 그대로를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가식적인 울음과 흐느낌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어머니의 장례식이 펼쳐진다고해서 평소와 다를게 없으며 평소의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굴곡적으로 요동치지 않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취한 뫼르소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는 것은 혈연 관계의 중요성을 상정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는 오늘 장례식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뫼르소의 처사가 매우 못마땅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감정일 뿐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배심원들의 동정표를 모으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뫼르소의 인생관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주변 친구들과 그다지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절친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이성의 판단에 의한 손익의 개산에서 취해지는 관계가 아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그들을 위해서 양심적으로 소홀할 수 없는 처신을 하는 것은 인생을 달관한 철학자의 사색으로 매일매일 성찰한 삶이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더 특이할 만한 것은 뫼르소의 결혼관이다. 그는 결혼이란건 중대한 일이 아님을 확신하며 살았던 것 같다. 흔히 결혼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전통적으로 매우 중히 여겨왔다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정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뫼르소에게는 그다지 볼품없는 겉치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이란 것도 한 순간 머물다 사라지는 뜬구름임을 호소하려는 것이 뫼르소의 의도가 아닐까? 긴장과 흥분으로 요동치며 쾌락으로 세월을 보내고 싶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울일뿐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생 여정의 밀물이 몰려들어 감정의 숲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처사가 아닌가? 늪에 빠진 몸이 자꾸만 깊숙이 들어가듯이 이성의 마비로인해 발생하는 지속적인 오류로 보여진다. 즉 쾌락으로 가장한 기쁨, 행복이 결혼으로 주어지는 미화가 나닐까?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주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인간의 감정과 쾌락도 주 하느님이 주관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보다 더 고귀한 무엇인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빼먹을 수없는 가치를 안고 있으며 그것을 생각해보고 그대로 실천해 보지 않고는 결코 그것만의 고귀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나 그 선상에 머무를 수 없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적적한 때를 알고 그 시기에 맞춰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뫼르소는 인간의 생체리듬의 때를 거슬러 살지는 않았지만 그 적절한 때를 맞춰 사회제도화하여 이를 어기거나 소홀히 하지 못하게 하는 올무를 뒤집어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개별 감정에 순종했으며 그 감정은 분명 절제된 이성의 선택으로 조절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성을 통해서 감정을 받아들임이 자칫하면 무분별한 사람이나 책임회피자 혹은 현실도피자쯤으로 인ㅅ힉될 수 있겠으나 이는 명확히 하자면 잘못된 추론이다. 뫼르소가 결혼을 애써하려하지 않는 것은 결혼 제도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그는 단지 결혼의 불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뫼르소의 입장은 정제된 종교 규율에 닫혀진 혼인의 불가해서성 이전의 자유로움에 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이다. 오히려 인류의 근원인 아담과 하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더 진실된 진술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아무도 아담과 하와가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보다 오히려 주님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느끼는 사랑이 더 크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최상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생각하며 그분과 일치됨이 절대적 행복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백공이 진퇴되도록 사무치는 육신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과 인간이 한 방향으로 일치를 이루며 유희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진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내 배우자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당신이게끔하고 나를 나이게끔하는 그형상으로 인하여 실존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배우자는 단지 하느님에게로 향해있는 표상의 반쪽일 뿐인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때 감각적 쾌락과 합리적 이성의 최상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뫼르소는 삶을 유희할 줄 알았으며 죽음에 또한 초월적이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재판 심문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자신의 의견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의 운명이 결정지어짐을 나타까워 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에 대하여 애써 거부하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어려움에 처한 현실 앞에서 솔직해지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옛날 아버지께로부터 들었던 사형장의 진실을 이해하는데서 애써 위로를삼았다.
뫼르소는 검사의 논리적 상황진술에 어리둥절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일뿐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사실 살인과는 아무런 연관없는 사생활과 그의 성격이 중대하게 취급되어 판결에 접목되어짐에 놀랄 뿐이었다. 평소에는싫어하지 않던 유순한 성격이 중형에 처하도록하는 사건의밀미가 되었을 때 그는 그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이슬로 사라져간 내막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심판에 대하여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자유로운 표현의 멈춤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가 도달해야할 목표를 눈앞에 두고 기다리는 초조함이다. 비록 앞날은 창창하여 희망으로 가득할 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을 인정하는 과묵함이다.
고백사제의 면회를 거부하고 그가 뫼르소에게 기도해 주겠다고 했을 때 뫼르소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뫼르소가 보기에 인간은 모두 같은 특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특권은 세월이 실어다 주는 바람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 앞에서 모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고백사제의 관용어린 표정과 자신만만한 태도에 거부감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만상은 서로 닮아가기를 원하고 또 그리로 나아가고 있으나 유독 고백사제 만큼은 홀로 도도하고 세찬 바람앞에 숙연해지려하지 않으려는 영원이라는 허울을 덮어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숙명의 과제가 있음을 뫼르소는 느꼈다. 그것은 자신만만하게 살아온 고백사제에게도 있고, 인생의 황혼기에 약혼자를 두었던 어머니에게도 있고 셀레스트와 레몽 그리고 마리에게도 숙명의 과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이방인으로서의 허울을 벗고 무관심과 침묵의 형제가 되기를 원할 때 이루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잃고 난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유희다 그것은자기에게 펼쳐진 상황을 마무런 불평없이 활용하면서 인간 관계에서 오는 구속을 꺼려하는 자유로움이다. 그 자유로움은 육신의 해방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자기 내면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유순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타인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대화를 하다보면 어느듯 자기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에 흡수되어버린다. 아니 그 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차원의 신뢰감을 자아낸다. 그것도 모자라 상대방이 자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다. 그러고도 호히려 상대방을 안심시키려고 자기가 먼적 미안해하고 상대방이 마음 상해할까봐 걱정한다. 그러한 뫼르소의 모습은 삶을 즐기며 달관한 이방인의 모습이다. 뫼르소에게 세상은 잠깐 머물다 쉬어가는 순례자의 거처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결코 이 세상은 순계자가 도달해야할 모적지가 될 수 없엄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는관심의 대상이 못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방인은 세상을 유희한다.
우리는 누구도 제외없이 시세상이 낯설다. 서로가 낯설기에 늘 긴장의 연속에 놓여있다. 그 묘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얼굴 붉히며 화를 내야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뫼르소는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퉁명스러워하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을 생각 그대로 믿어주는 여유로움은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볼 수 있는 점이다. 그것은 결코 세상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사회체제에 얽매인 권위를 자랑하는이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자신의 세속적 권위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 허식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뫼르소가 철창을 통해서 밤하늘의 가득한 별을 바라보며 느꼈던 마음에로 근접해가는 것이 유익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은 세계와 자신의 닮아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닮음은 인생을 완성에로 이끌어 줄 것이며 모두가 한 형제가 되도록 변화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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