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야기

검은꽃 - 김영하

jasunthoma 2008. 12. 9. 15:11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박광수 바오로는 개항기 시대의 카톨릭 신부로서 그는 자기가 생각하던 신앙의 증거, 거룩한 전교, 거룩한 순교를 하지 못하고 부임지에서 일어난 자살사건에 연루되어 나라를 등지고 멕시코로 이주하는 배를 타게 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서해에서 가장 큰 유인도라는 위도에서 보낸다. 그 위도는 조기잡이를 해서 먹고 사는 섬이다. 어장에서 조기잡이가 한창일 때 선주들이 돈을 내 별신굿을 벌이고 연초엔 액운을 실은 띠배를 띄워 보내며 풍어를 기원하는 띠뱃굿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이들을 위해선 용왕굿을 올린다.

 

굿이 다가오면 마을은 금기로 가득 찬다. 이 축제가 시작되면 무당은 제사를 지내는데 열두 서낭과 용왕신이 첫 번째 관객이다. 띠배를 묶은 끈을 잘라 저 먼 바다로 떠나보내면 위도는 질펀한 춤과 술, 노래로 밤새 흥청거린다. 박광수의 아버지와 삼촌은 조기잡이를 나갔다가 죽고 어머니는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얼마 후 무당의 집으로 끌려가는데 무당은 그에게 장구를 가르친다. 무당의 광기어린 행동에 못 이겨 광의 창살을 부수고 밤새 도망쳐서 해미읍성으로 간다. 성문으로 들어가려다가 군인에게 발각되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아이는 군인에게 목덜미를 잡힌 채로 들어올려지는데 그 때 어린 박광수는 그만 겁에 질려 무당에게서 배운 어설픈 주문을 외운다. ‘곰소무당이, 궤짝, 찌르고, 위도에, 삼촌이, 건장이, 아버지, 무당은 죽고, 배고프고, 관운장과 최영 장군께서 덩더쿵 덩더쿵.’

 

군인이 집으로 데려가 먹을 것을 주고 거기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논다. 그는 천주님을 믿어야 천국에 가리라 했다. 그곳엔 임금도 양반도 없으며 또한 배고픔과 학정이 없으니 영원히 행복만이 가득하리라고 가르친다. 얼마 후 어린 박광수는 깊은 산 가마에서 숯을 굽는 마을로 가게 된다. 눈이 파란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운다. 그 때부터 박광수라는 이름대신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파견되어 신학교를 마치고 신부가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멀리 말레이시아의 페낭까지 가서 신부가 된 것은 어쩌면 죽은 삼촌과 무당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 불길한 주술적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멕시코 농장에서 일할 때 동족들 중에는 박수무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다시 무당과 같은 방에서 잠들고 있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인생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는 어렸을 적 무당으로부터 받았던 악몽이 되살아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멕시코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겪으면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나라도 버리고 종교도 버린 자신을 목적 없이 떠도는 먼지 부스러기보다 못한 존재로 여긴다.

 

박광수를 말레이시아 페낭의 신학교로 보내 사제로 만든 시몬 블랑쉬 주교는 1880년 중국 텐진을 떠나 백령도에 상륙, 선교활동을 벌이다 황해도 백천에서 체포되지만 민씨 정권의 개국책으로 석방된 사람이다. 그리고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다. 동료 선교사들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된 것에 비하면 그는 정말 운이 좋은 편이다. 박광수는 주교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성당으로 가지 않는다. 주교는 고통스런 표정으로 젊은 신부의 눈을 바라보며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오로의 소명이라고 한다. 성당에 가서 돌을 맞고 멍석에 말리는 한이 있어도 밝힐 것을 밝히고 교회의 입장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라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끝내 모든 것을 가려주실 것이라고 한다.

 

박해시대에 선교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주교는 바오로 신부에게 ‘그것도 모르면서 사제가 되었단 말인가?’하고 다그쳐 물었다.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고 부모가 죽어도 울지 않는 종교가 한반도에 뿌리 내리기란 쉽지 않다. 그 나라의 종교적 정서가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광수가 떠안아야 했던 것은 단순히 선교를 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개국책을 써서 부분적으로 종교적 자유가 많이 주어지고 있었으나 박해로 인해서 이미 다수의 사람들이 순교를 했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라가 몰락해 가는 고통과 카톨릭 교회의 사제로서 정체성이 흔들리는 이중고를 겪는 어려움 속에서 자아상실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고 익힐 때와 사뭇 다른 것이 현실이자 본당 사목인 것이다.

 

박광수는 사목자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고향을 등지고 도주하게 된 현실에 비관하며 자책감에 빠진다. 그는 허둥대며 걸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누군가의 집 문턱에 쪼그려 앉는다. 낮은 곳에서 보는 세상은 달랐다. 사람들의 발과 다리만 보인다. 그렇게 인격이 사라진 육체만을 바라보다 잠이 든다.’ 그는 사제로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본당사목 활동을 하고 있을 때에는 알지 못했던 인격이 사라진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며 낮은 자들의 인격에 대하여 새로 알게 되었다. 똑바로 서서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사람의 얼굴이 먼저 보이지만 쪼그려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면 발과 다리가 먼저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인격이 사라진 사람들의 발과 다리만 보이는 것이다.

 

박광수는 카톨릭의 사제가로서 불미스러운 오해를 사는 것 보다 차라리 배교의 강압으로 순교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불미스러운 여자관계였다. 신앙 생활하면서 가끔 찾아오는 어려움들이 있다. 특히 성직자에게는 여자 문제가 생기게 마련인가보다. 사제로서 한 평생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지역민들과 여러 가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갈등은 박광수를 거리로 내 몰았고 거리에서 시몬 블랑쉬 주교가 사제서품 기념으로 준 십자가 목걸이를 좀도둑에게 빼앗기고도 별 관심을 두지 않을 지경이 되어 한 가닥 남은 회개의 희망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제직분을 버리지 않고 충실하게 살 때에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인격적으로 보이지만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상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인격이 사라진 존재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찌 이토록 나약한 것일까요. 애초에 사제가 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요?’라며 자신의 고귀한 소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다. 한 여인의 자살에 의해 그의 인생이 몰락해버리고 마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멕시코로 가는 배안에서 이질로 사람이 죽어가자 박광수는 자기가 할 일을 찾는다. 다행히 페낭에서는 신학도들에게 약간의 의술도 가르쳤는데 이는 토착민들의 신뢰를 얻고 유대를 강화하는데 의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치료보다는 병의 위협으로부터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그는 고열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준다. 박광수는 자신의 신분이 사제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병자들이 헛것을 보고 말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자 ‘어쩌면 이중에도 천주교 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성사를 집전해야 하는가. 만약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종부성사를 청해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주교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양을 버리고 달아난 신부에게도 그럴 권한이 있을까.’라고 고뇌하게 된다.

 

신앙인이라면 가끔 구내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성호를 크게 긋고 큰 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면 몰래 성호를 긋고 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싶을 때도 있다. 자신의 신앙심이 타인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 같을 때 마음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특히 혼자일 때 더욱 그렇다. 나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속으로 기도하고 몰래 성호를 긋는데 그러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직까지 이 나라에는 종교적 정서가 카톨릭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혹독한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신앙심에 입은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런 것도 아니면 타 종교인들을 의식한 민족주의적 배려 차원에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박광수의 자신 없는 신앙생활처럼 내가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에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광수는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양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상에서 고열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어린 양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다한다고 하면 주님께서도 기꺼이 용서하시고 그를 기쁨으로 안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 병자들 중에 신자가 있어 그 하나가 죽기라도 한다면 종부성사를 줘도 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모든 성사는 사제의 손을 빌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멕시코는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 후 많은 원주민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예수회 회원으로서 멕시코로 들어와서 전교하던 수사는 그들의 종교적 행위가 자신이 배웠던 종교와 너무나 다름을 알았다. ‘우선 과달루페의 성모가, 즉 인디오들이 굳이 토난친이라고 부르는 그 여자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성모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대부분의 인디오들은 성모 얘기에는 관심을 보였지만 삼위일체 같은 핵심 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나 성인들을 자꾸만 또 하나의 신으로 이해했다. 그들에게 성모는 여신이었고 예수는 그의 이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다. 말하자면 그 원주민들은 죽어 있는 예수를 사랑했다. 관에 누워 있거나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는 모습을 그들은 즐겨 조각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교회의 의식에 심한 자학과 끔찍할 정도의 고행을 자꾸만 추가하여 고딕 풍의 복잡하고 장중한 의식을 그 옛날 아스텍의 인신 공양 제와 비슷하게 만들어버렸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해서 반드시 손바닥에 못을 박고 스스로를 십자가에 매달 필요는 없다는 걸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예수회 선교사는 결국 자신이 인디오들의 전통적 샤머니즘과 싸우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족마다 주술사들이 있어 병자를 치료하고 제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일요일만 교회의 영향 아래 있을 뿐, 대부분은 마을의 샤먼들과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선교사는 예수회 회원으로서 전도를 그만두고 강력한 사설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인디오 마을 곳곳에 쳐들어가 우상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종교 의식을 하며 황홀경에 빠진 이들을 학살하였고 그곳에 붉은 십자가를 세웠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으나 숱한 사생아를 두었다. 그의 아들들도 하나같이 반종교개혁과 인디오 개종에 몸 바쳤고 그들 중에 하나가 조선에서 이주해 온 농장의 주인이었다. 조선인들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고 개종하여 미사에 참례하면 급료를 올려주고 주일에는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모두 환영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뜻을 정확히 몰랐다.

 

주일이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박광수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라틴어와 성가 소리에 가슴이 아파왔다. 라틴어 기도문을 외는 백인 신부를 보며 조선 땅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제 영원히 제대에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나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했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반대다. 그러나 박광수는 농장주 앞에 끌려가 자신의 배교사실을 증언하고 싶지 않았고 도둑처럼 거짓 신앙을 꾸며내고 싶지도 않았다.

 

일을 하던 동료가 심한 피부병에 걸려 굿을 하게 되자 농장주는 무당을 쫓아갔다. 농장주는 장화를 신은 발로 무당이 쓰던 방의 제단을 박살내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성경구절을 외웠다. 농장주는 무당과 함께 방을 쓰던 박광수를 향해 달아난 무당이 어디로 숨었는지 말하라고 다그쳐 물었다. 그리고 박광수의 배를 개머리판으로 치고 침을 뱉으며, 더럽고 미개한 악마의 자식들! 이라고 욕을 했다. 박광수는 농장주와 똑같은 구절을 생각한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올린 그 기도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 곧 무당은 잡혀서 끌려가고 만다.

 

조선인들은 굿판을 벌이다 잡혀간 무당을 구하고 농장주의 저택에 돌을 던지며 항의 하였다. 잠시 후 농장 정문으로 요란한 발굽 소리를 내며 말을 탄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때를 맞춰 저택의 문이 열리고 농장주와 감독들이 총을 쏘며 달려 나왔다. 결국 모두 포위되어 끌려간다. 박광수도 경찰의 곤봉에 맞아 뒤통수나 이마에 피를 흘린다. 박광수는 눈으로 흘러드는 피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한 채 농장주 앞에 끌려나오며 말한다. ‘이것은 아니오!’ 이어 박광수는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니오! 가장 헐벗은 자, 가장 가난한자, 가장 핍박 받는 자와 함께 하라는 것이 당신이 믿는 신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까?’

 

박광수 신부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 덕에 목숨을 건졌고 그 사람을 위하여 말레이시아의 페낭까지 다녀왔다. 그 사람처럼 되겠노라며 바닥에 엎드려 서품을 받았다. 처음 첩첩산중의 숯골에서 그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너무도 기이한 그 종교의 탄생설화에 매료된다. 그것은 정녕 이상한 이야기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고향 위도에선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곳에선 일 년에도 수십 번씩 신이 인간의 몸을 빌려 현현한다. 그런데 그 신이 인간의 몸을 떠나지 않고 아예 평생을 살아버린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을 박아 꿈쩍도 못하게 나무에 박아놓고 죽기를 기다리는 처형방식의 잔혹함은 새롭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빌려 온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결국 무력하게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리고 그 자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애써 죽더니 사흘 만에 부활하여 제 몸을 그대로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어쩌면 이야기에 가득한 그 모순들에 그는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신이며 인간이고 전능하면서 무능하며 끔찍하면서 신비로웠다.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하는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다는 것은 사랑의 절정이다.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했으니,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그 장면을 보고 무리가 기막혀 하고,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는 마른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며,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고,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다.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고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준다.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는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고, 인간사회에서 끊겨서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한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힌다. 주님의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재물로 내놓는다.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살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라는 성경말씀에서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린 모순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박광수는 맞으면서도 일어나 라틴어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주기도문과 영광송, 성모송, 사도신경이 그의 입에서 줄줄줄 흘러나온다. 박광수는 지금이야말로 진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이 계신다면, 자신에게 사제로서의 위엄을 부여하실 것이다. 바로 지금 신의 권능과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몇몇 감독들은 박광수가 아멘이라고 외칠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농장주는 박광수의 행위를보며 기이한 현상을 보라 사탄이 주의 말씀을 더럽히는 것을 악마의 권능이 그의 입을 빌려 신성한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저주한다. 저 극동의 미개한 나라에서 온 자가 라틴어 기도문을 줄줄줄 외며 사제의 흉내를 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눈엔 사탄의 소행처럼 보였다. 순간 박광수는 분명히 깨닫는다. 그의 신은 정녕 질투하는 신이다. 샤먼으로 비롯된 싸움에서 신은 어떤 권능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악을 약한 자들이 대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신은 토라진 여자아이처럼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박광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자신을 바오로라 부르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신부 바오로가 아닌 박서방 박광수로 되돌아갔다.

 

그 후로 박광수는 악몽에 시달린다. 어떤 여자가 찾아와 하얀 쌀밥에 참조기를 구워 밥상을 차린다. 박광수는 여자를 홀깃거리며 허겁지겁 밥을 먹어치운다. 여자는 나가 숭늉을 끓인다. 배가 부른 박광수는 여자의 얼굴을 살핀다. 여자는 숭늉을 받쳐 든 쟁반을 내려놓고 살며시 그의 옆에 와서 앉는다. 그는 여자의 손목을 꼭 잡는다. 뭐라고 할 수 없이 따듯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그는 눈을 감는다. 멀리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거기서 만나요라며 그녀는 힘차게 달려간다. 새벽안개 속에서 분명해져오는 거대한 당목에, 마치 벼락을 맞아 부러진 가지처럼 커다란 것이 매달려 덜렁거린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목을 맨 그녀. 스물에 청상이 되어버린, 밤마다 그의 언저리를 맴돌던 그 아릿한 여자가 거기 매달려 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느 새벽, 아무 죄도 없는 그를 안개 낀 마을의 초입으로 초대하고 자기 시체를 보여준 것이다.

 

신한국을 선언한 혁명군들이 끝까지 저항하지만 정부군에게 당하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결국은 모두 소탕되고 만다. 박광수는 애초부터 마지막 은신처이던 제4신전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그는 그곳이 좋았다. 그곳에서 그는 석양이 지는 것을 본다. 북쪽 사면과 저수지 쪽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멈추고 정부군이 제4신전 정상으로 올라오는 동안 그는 차분히 앉아있다. 정부군 병사가 올라와서 앉아있는 그의 몸을 군화발로 툭 밀친다. 박광수는 오뚜기 인형처럼 뒤뚱거리며 양손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밝게 웃었다. 정부군 병사도 웃으며 그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신전 속으로 그의 시체가 떨어진다. 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장면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맛보게 된다.

 

박광수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나 홀로 던져진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엿보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살아가야 하는 삶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세상은 감성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생각건대 세상에서의 진리는 단 하나, 사랑으로 요약되는데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보자기와 같다. 그 보자기 안에는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정신, 언어, 영혼, 인간, 기계, 자연, 동물, 생물 등.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선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서가 있다. 순서가 빠르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 순서가 늦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순서는 시간 선상의 열거일 뿐이다. 어떤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순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순서를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시간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인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와 무관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내 의지대로 세상을 움직이려하는 것이며, 이 것이 곧 죄악의 시작일 것이다. 물론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기도 하지만 그것도 스쳐가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허상일 뿐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놓은 것이 보잘것없이 보이게 마련이다. 곧 바다의 모래 한 톨이 움직였을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 계란으로 바위치기 정도의 의지로 밖에 안 되는 자신의 무능함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시대를 비관하고 때와 장소를 탓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을 지금 당장 벗어나려고 도피 하거나 옛날을 회상하기만 할 뿐 현실을 회피하려고만 한다면 박광수처럼 몰락해 가는 나라를 피해 희망이 있는 나라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곧 악에 의해 패배당하고 마는 것이다.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만 지금 이 자리를 잘 살아갈 때에 비로소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