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위령의날 둘째미사 마태11,25-30 (스승// 241211 리디아)

jasunthoma 2014. 11. 2. 06:00

지나가다가 우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그는 우물인지 알고 빠졌을까요? 우물인지 모르고 빠졌을까요? 우물인지 모르고 빠졌다면 우물이 아니라 우물이 함정인 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안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유다인들의 안식은 공간 속의 안식이 아니라 시간속의 안식이라고 유다인 철학자 헤셸(아브라함 헤셸)이 해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대에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워주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잠시 시간속의 안식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움직이지 않는 안식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활동적인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안식은 기존의 유다인들의 안식과 무엇인가 다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주겠다고 말씀하신 안식은 안식의 파스카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실재로 카톨릭교회는 유다인의 안식일(성토요일)을 안식일로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건너가버렸습니다. 무시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과 시련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있어서 오히려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무시해버리셨습니다.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소가 우물에 빠질 수가 있을까요? 팔레스티나 우물이 소가 빠질만큼 크다는 말일까요? 속은 넓을지는 몰라도 겉은 두레박 하나 들어갈만큼 밖에 되질 않습니다. 뭘 의미하는지 다 알고 계실겁니다. 소가 우물에 빠질 수가 없지만 만약에 빠지면 그것은 더이상 우물이 아니라 함정이라는 말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기가 쉬울 것이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함정에 빠진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재물의 유혹은 곧 낙타조차도 바늘귀로 빼간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은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지 알지 못한다 고 말씀한셨습니다. 이렇듯 유다인의 안식일은 온갖 함정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따라서 살아서 안식을 누리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고 죽어서야 비로소 안식을 누리면 지금 살아있어도 죽은거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함정에 빠지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서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성모님께 맞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머니의 아들로, 그리고 어머니를 제자들의 어머니로 맺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날이었던 성토요일(유다인들의 안식일)에 이세상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건너가셨기 때문입니다. 함정에 빠진 사람을 구하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통과하셨던 것입니다.

 

복자 알베리오네 또한 휴식이란 (하던 일을 멈추고 휴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휴식을 건너가서) 일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안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명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하십니다. 등짐지던 시절이 있습니까??? 못자리에 약치던 시절을 떠올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무일도 제2주간 목요일 아침기도 시편 81,7 "등짐 지던 그의 어깨를 내가 풀어서 채롱 들던 그의 손도 풀리었도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명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여기서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메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앞에서 안식은 건너가는 것/ 통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멍에가 뭘까요??? 멍에는 "쥐곤ζυγόν"인데 쥐곤의 어원 "즈데우그뉘미ζεύγνυμι"- 잇다/연합하다/묶다/장착하다/얽다/매다/참여하다/연결하다/혼인하다/결혼하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멍에라는 말로 번역된 쥐곤을 묵시록6장에서 한차례 사용되었는데 어린양이 여섯 봉인을 푸는 대목에서 쥐곤을 "저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첫째봉인을 뜯었는데 "희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는 "활"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봉인을 뜯는데 "붉은 말이 나오는데, 구 위에 탄 이는 큰 "칼"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봉인을 뜯는데 "검은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이는 손에 "저울"을 들고 있었다

넷째 봉인을 뜯는데 "푸르스름한 말 한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이의 이름은 "죽음"을 들고 있었다

다섯째 봉인을 뜯는데 죽은 영혼들이 있는데, 그들 각자에게 "희고 긴 겉옷"을 주었다

여섯째 봉인을 뜯는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제자리에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프로소폰"과 어린양의 "진노/오르게"가 있었다.

 

여기에서 어린양이 셋째 봉인을 뜯었을때에 뭐가 있었다고 했습니까??? 저울이 있다고 했습니다. 멍에와 같은 단어 "쥐곤"입니다. 무슨말입니까??? 멍에가 곧 저울이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실 때에 나를 입고 나와 결합된/혼인한 사람은 안식(지나감/건너감/통과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저울을 어깨에 걸치면 세상의 어떤 불공정도 없고 치우침도 없고 자유롭고/평등하고/정의로운 세상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두 물동이 이야기~~~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