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시월의 마지막날이고 다음달은 전례력으로 한해의 마지막달입니다. 11월 30일이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주일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 여정의 종착지인 예루살렘을 향하는 장면을 통하여 당신의 의지를 확고히 하시는 듯 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으로 더욱 가까이 가시고 또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노라고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실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옷가게에서 쇼핑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 가시며 "샬롬" 하고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슨 옷을 사는지 유심히 보고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스승님도 한 벌 사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에 입던 누추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 때에 새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며 음~ 옳은 말이구나 하시며 이어서 한마디로 말씀을 맺으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을까요?? "예루살렘"
그렇다면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이 어떤 장소이며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리고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실 정도로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여기셨는지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기원을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살렘/모리야/여부스/다윗성/솔로몬성전/
멜키체덱은 살렘왕이며 아브람은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침(창세14,18)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바친 모리야(창세22,2)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은 유다의 자손들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부스족은 오늘날까지 유다의 자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살고있다(여호15,63)
벤야민의 자손들도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판관1,21)
그러한 여부스족을 다윗왕이 쫓아냄(2사무5,8)
다윗은 여부스족의 성읍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혼샘과 연결된 지하수로를 이용했음
다윗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솔로몬은 계약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지었음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놓은 곳이었음(2역대3,1)
이렇게 솔로몬에 의해 봉헌된 예루살렘의 상징인 성전은 세차례에 걸쳐 짓고 세차례에 걸쳐 파괴되는데 마지막으로 파괴된 이후 오늘날까지 다시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암닭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하셨던 곳은 예루살렘을 두고 비유로 하신 말씀하신 것이지만 사실은 돌로지은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곳에서 왕으로 추대될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 할 장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40일 피정 -> 셋째형의 죽음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당신의 예루살렘은 과연 어떤 예루살렘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제는 돌로 쌓아 올린 그런 예루살렘은 버려질 것이고 앞으로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어라'하고 찬미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천상 예루살렘이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감시하는 예루살렘이 아님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제1의 원칙으로 여기는 안식일을 상징하는 그런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을 경외한다는 이유로 주님의 이름조차 직접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경외심조차도 안식일의 본 뜻을 변질된 경외심의 발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그런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천상의 거처로 옮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유다인들은 하느님(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하느님을 속되게 하는 것을 극구 경계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너무나도 부르고 싶지만 하느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단지 '하늘'이라고만 한다거나 아예 '침묵'으로 건너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사랑한다는 말은 못하고 매번 '좋아해'라고 말하거나 아예 딴청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것보다 더 가슴아픈 사연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간으로서 그 누구도 감히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당신의 이름을 남겨놓으심으로써 그동안 하느님의 이름조차 마음대로 부르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며 전전긍긍하던 제자들의 숨통을 트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하느님으로 고백해 부름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되고 또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를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거대한 안식일 파수꾼의 상징물로 변질시켰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을 왜곡시켰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날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유다인의 안식일입니다. 정확히는 안식일 바로 전날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온전히 죽으신 날은 안식일(토요일)입니다. 우리가 3일장을 치르틑 이유는 유족들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3일이라는 장례 기간에는 온전한 하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안에 사람이 온전히 죽었음을 받아들이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관례상 온전한 하루가 지나지 않고서는 사망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참으로 죽음을 맞이 하셨지만 다음날이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빨리 사망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성경에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인 장례기간보다 빨리 무덤에 뭍히십니다. 숨이 멈추고 심장이 뚫렸으니 인간적으로 그보다 더 확실한 죽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식일 전날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뭍혀계셨던 안식일 당일날은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3일이라는 장례기간 중 온전한 하루에 해당하는 안식일날 즉 부활하시기 전 날에 해당하는 성토요일에는 과연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날에는 일년 중 단 하루 미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세상에 계시지 않는 유일한 날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일년 중 단 하루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만 언제라도 계시지만 일년 중 단 하루 성토요일인 유다인의 안식일날에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고 고백합니다. 지옥까지 내려가서 암닭이 제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그날만큼은 세상 끝까지라도 가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 품에 품어안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날 같은날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온다고 믿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날 같은날 지옥에까지 내려가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안식일과 그리스도인들의 주일입니다. 유다인(랍비)들은 안식일에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사람이 영혼의 세계로 들어올려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천사들을 맞이하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노래하는 주님의 날, 주님이 다시 오신 날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을 통하여 유다인들의 안식일을 건너가신 날 다음 날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간 첫째날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주간 첫째날에 무엇을 만드셨습니까? "빛이 생겨라"(창세1,3) 하고 빛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첫번째 음성은 빛이 되어 온 우주에 울려퍼졌습니다. 그래서 또한 예수님이 여섯째날(금요일) 숨을 거두시고 일곱째날(안식일)에 온전히 죽으시고 주간 첫째날 부활하셨다는 것은 유다인들의 안식일을 건너가셨다는 실로 중대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스카의 의미인 건너가다라는 의미와 같은 맥락입니다. 죽음을 건너고 억압을 건너고 고통을 건너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우리가 직접 부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과 함께계시는 성모님을 통해서 부르는 방법입니다. 로사리오 성월을 보내고 위령성월을 맞이하게 됩니다. ~~~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흘째 되는 날이 오면 당신이 걸으신 지상의 도정을 마치고 영원한 삶의 거처에로 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과 내일은 우리의 병고를 맡아 지시고 마지막 날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는 기도를 바치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돌로된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여린 마음속에 있는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어둠에 묵여있는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너희는 돌로 된 골방에 들어가지 말고 살로 된 골방에서 기도하여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여우로부터 병아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 날개 밑으로 끌어않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잠깐 위험을 피하고 평안할 수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과 내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기에 지금의 어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다가올 천상의 하루를 위하여 지상에서 나날의 수고로움을 우리도 기꺼이 봉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연중제30주간 목요일 루카13,31-35 (20241031 전주협력자)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하고 예수님께 알려줍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마태오복음에서 소개되는 동방박사들의 경배 이야기(마태2,1+)가 있지만 그보다 루카복음에서 소개되는 세례자 요한에 의한 증언때문에 헤로데는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루카3,1+)으로 인하여 몸시 불안해 하며 권력을 유지해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요한이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자 요한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이시라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루카3,15+)
그러나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갈릴레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변모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루카9,51+)
예루살렘을 가시는 길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 사이를 지나 요르단강을 따라 예리코까지 내려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루카17,11+)
예언자는 자기가 어디에서 죽어야 할지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레아 사람들을 죽여서 그들의 제물을 피로 물들게했던 예루살렘입니다.
빌라도는 빌라도대로 형상이 없는 신에게 경배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듯이 죽이고
헤로데는 헤로데대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상을 숭배룰 묵인하던 빌라도보다 또는 야훼하느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바쳤던 헤로데보다 더 열심히 성전을 지으시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늘나라의 모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헤로데가 46년에 걸쳐서 지어 바친 성전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거대한 성전을 단 사흘만에 세워서 봉헌하시고
빌라도가 허용했던 우상들의 풍요로움 보다 훨씬 더아름답고 다양한 하느님의 모습을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영광스러운 변모 이후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 (루카9,51+)
베엘제불-예수님과 베엘제불(루카11,14+)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루카13,32)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루카19,28+)
더러운 영-마귀-사탄-악령
오늘하루 우리 안에 내재된 선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말씀의 씨앗으로 당신은총의 풍성한 부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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