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이른 아침 눈 덮힌 산에 오르면 으레 상고대가 피는대
바람이 날을 새워 눈발을 머금어다가 여명이 트기까지 나뭇가지에 메어 붙입니다.
동이트면 그 자태를 한창 꽃피우는데 두 눈을 바로뜨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해가 중천 머리에 뜨기 전 고대 꽃이 다 떨어지면
언제 새하얀 상고대가 피었다가 졌는지 늦게 올라온 사람들은 도통 알길이 없습니다.
인적도 없고 산짐승들 조차 숨을 죽이는 고요함 속에서 일어난 변화이지만
그 가운데 있지 않으면 아무일 없이 지나가버리는 형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엎드려있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은 흉칙하게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자신을 깨끗하게 해 달라는 청원기도를 드리기 위한 행동도 아닙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엎드린다는 것은 자신이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단단하게 굳었던 흙이 부드러운 한 줌의 흙 속으로 들어가리라는 것을 바라는 원의가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진 빚을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당신께서 다 갚아주시기를 바라는 온전한 자기 봉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가족 수녀회에 종신서원식이 있는 날입니다.
종신서원식은 열매의 껍질에 비유할 수있습니다.
껍질이 단단하지 못하면 열매는 터져버립니다.
시일이 지나 속이 부드러워지고 연해지면 두텁던 껍질은 더욱 얇아지지만 결코 약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잘 익은 열매일수록 껍질은 더욱 질기고 짱짱해지는 법입니다.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매번 일정한 때가 오면 해마다 한 차례씩 허원을 하다가
이제는 종신토록 한 번의 서원으로 수도회의 한 가족 한 식구로 살겠다는 하느님과의 약속이 종신서원이기도 합니다.
결국 종신서원을 통해서 표면은 더욱 견고한 결속력을 지니게 되지만 속은 더욱 유순해지고 겸손해 집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서약했던 겸손한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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