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는 너는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시는 반면
또 누구에게는 예수님 당신은 머리 기댈 곳 조차 없는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모두 나를 따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적극적인 율법학자는 율법학자대로 물리치시고
다소 소극적인 제자는 제자대로 그의 바람을 저버리신 이유는 뭘까요?
이들에게서 두 가지 기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크게 능동적인 기도와 수동적인 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처럼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능동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고
제자처럼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수동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능동적인 기도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결심하고 실천한 뒤에 그에 따르는 잘 잘못을 받아들이지만
수동적인 기도는 주부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기도이므로 스스로 움직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는 끊임없이 허락을 구하는 수동적인 기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때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상황에 맞게 이 두 기도를 바치기를 바라십니다.
면밀히 살펴보면 율법학자는 율법학자대로 기도드린 바가 이루어지고
제자는 제자대로 간곡히 드린 청원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에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학자가 드린 능동적인 기도는 이미 이루어진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결심을 했기에 실천만이 남은 것입니다.
스승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노라고 확신을 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관해서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시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자가 예수님께 청원한 아버지의 장례치르는 일도 받아들여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장례식장으로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자는 혼자 갈 필요가 없게 된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시고 제자는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부친이 상을 당했는데 혼자 내버려두실 스승이 어디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은 이들의 장례식장이 생명으로 약동하게 됩니다.
슬픔도 슬픔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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