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9주간 화요일 마르12,13-17 인간의 것과 하느님의 것

jasunthoma 2013. 6. 4. 03:37

어릴때 저희 외할머니는 저를 비롯하여 손주들을 많이 키우셨는데 방학기간이 되면 서울에서 손주가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으레 외할머니께서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그럴 때에는 두 손가락으로 그 아이의 코를 집으시며 이 코가 누구 코냐?하시고

또 눈을 짚으시면서 이 눈은 누구 눈이냐? 혹은 귓볼을 잡으시며 이 귀는 누구 귀냐? 하시며

서로 좋아서 웃으시는 모습이 저를 비롯하여 다른 손주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 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렇게 되 묻는 바람에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단순하게도 인간의 것이라고 대답하고야 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물으셨던 이 물음은 그 동전에 그려진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모상을 물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은 창세기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지체없이 "황제의 것입니다"하고 서슴없이 대답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때 맞추어 기도하고, 제사 올리고, 시편을 노래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백성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가르친다고 자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에게 그런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고 엄중히 꾸중을 들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좀처럼 제자 베드로에게 하시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그다지 얼굴 붉히시지 않으십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을 오롯이 도로 바치'는 봉헌의 삶입니다.

그 삶의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 시절에는 돈이 필요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기에 돈이라는 것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보이게 된 것이입니다.

차츰 인간에게는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쇠 붙이 조각, 금은에서 찾았고 그것을 소유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것은 보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은 미약하고, 단순하고, 천박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같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큰 일들을 이루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얻어 먹을 수 있는 힘' 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기쁨이 될 수있다는 것을 압니다.

보이지 않는 분의 힘은 그런 나약한 갓난 아기와도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강하고, 귀하고, 지혜로워서 모든 일을 주관하여 큰 일을 이루시고야 마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되물음에 인간적인 것으로 한가지 밖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동전 두 닢을 모두 넣은 과부가 오히려 하느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바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것만을 따질 수 밖에 없는,

그들만의 '삶의 자리'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모두 봉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