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부활제7주간 수요일 요한17,11-19 (250604 성바)

jasunthoma 2025. 6. 4. 05:27

 

 

 

 

요한17,11-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17,11)

여기서 좀 특이한 점은 예수님의 일치에 관한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이 구절에서 “하나(헨)”는 숫자 1을 나타내는 단수/중성 수사(숫자)로 말씀하셨는데 보통 신약성경에서 인칭 앞에 숫자 1은 중성을 사용하지 않고 남성형이나 혹은 여성형 단수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7,50에서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기 전에 설명하는 부분인 “그들 가운데에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 . .”라는 구절에서 "한 사람"이라는 말은 한 사람이 니코데모이기 때문에 남성형 단수 “헤이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보통은 사람일 경우에는 남자든 여자든 명사 앞에 단수 또는 복수로 표기되고 숫자를 사용할 경우에는 남성형이든 여성형이든 분명히 성을 밝혀서 사용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이 따로 존재하면서 일치하는 차원이 아니라 숫자 일과 같이 온전히 다른 두 지체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기도를 드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바오로가 제자들을 받아들인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인 것 같습니다. 사도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사도20,35)

즉 사도 바오로의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받아들이는 일치는 두 지체가 서로 공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치입니다. 이렇게 바오로가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을 공동체적인 일치라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서로 일치하기를 바라는 방식은 존재론적 인치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공동체적인 일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형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형제적인 사랑이 아닐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존재론적인 일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에 가까운 일치가 아닐까???합니다.

온전히 내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듯이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지극히 신적인 일치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신적인 사랑의 일치가 아닐까???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나라의 일치/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형제들이 먼저 서로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50604 성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