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3,13-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십니다. 열두제자단은 두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첫째는 호숫가에서 부르심을 받은 다섯명의 제자와 오늘 산에서 부르신 열두명의 제자들 중에서 호숫가에서 부르신 다섯을 제외한 나머지 중복되지 않는 제자들 일곱입니다.
호숫가에서 부르신 제자 다섯은 또한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겠는데 핵심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어부출신의 네 제자와 세관장 레위입니다.
어부출신 네 제자 또한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첫 번째로 부르신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뒤이어 부르신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열두제자단의 핵심이 되는 어부출신 네명의 제자에 관해서 공관복음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또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마태/루카는 예수님이 네명의 어부를 부르실때의 순서대로 열거합니다. 베드로-안드레아-야고보-요한의 순서대로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마르코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갈라놓고 그 가운데에 야고보와 요한을 끼워넣어서 순서를 바꿔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네 제자의 순서를 바꾼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름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를 나름 생각해보자면 그 이유는 네 제자가 열거되는 순서를 통해서 요약된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호숫가에서 부르신 순서대로 하지 않고 야고보와 요한을 베드로와 안드레아 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순서를 엇갈리게 하게 되면 제자들의 모습이 재조명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엇갈린 순서에 관해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야곱과 에사오의 장자권 이야기도 있지만, 야곱이 요셉의 둘째아들 에브라임과 큰아들 므나쎄를 축복할 때에도 서로 엇갈리게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뻣어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엇갈린 순서는 성경의 핵심적인 원리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한다(마르9,35)고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하신 것도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엇갈린 순서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설명할 수 없고, 또한 이러한 역설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평화롭고 순조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며, 세상 이권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따라서 열두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의 골격이 되는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십자가에서 서로 엇갈리게 순교를 했고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엇갈리게 가장 일찍 순교(37살)하고, 죽지 않는 불멸을 겪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부르시어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신 것은 제자들 모두가 하나의 사도직으로 일치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사도직을 하지 않으면 사도가 아닐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무슨일이나 다 할 수 있겠지만 창립자가 제시하신 모델이신 성바오로 사도가 선포했던 사도직을 할 수 있는 바오로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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