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2월 5일 연중제4주간 수요일 마르6,1-6 (20250206 리디아)

jasunthoma 2025. 2. 5. 03:59

마르6,1-6

오늘 복음은 고향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시를 당해보셨는지요??? 사람들은 보통 어떻게 무시를 당하고 또 어떻게 무시합니까??? 다양한 방법으로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떻게 무시했습니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예수님의 직업과 어머니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하고 예수님의 집안을 무시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시 당하실 때에 어떤 방법을 통해서 지혜롭고 모범적으로 대처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시를 당할 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해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무시하는 사람들과 무시를 당하는 사람의 반응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띠는데 그것은 바로 놀라는 장면입니다. “놀랐다는 말이 두 차례 나오는데, 첫 번째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놀라움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놀라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놀라움과 예수님의 놀라움은 서로 다른 상반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이 놀랐다고 했는데, 여기서 놀랐다는 말은 액플레소인데 액플레소는 어리벙벙한/망연자실한/아연질색한/ 간담을 서늘하게한 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흔히 체험하는 놀라움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놀라움은 뭔가 유쾌해 보이지 않는 놀라움입니다. 놀란 뒤에 뭔가 찝찝하고 불쾌해 보이는 놀라움입니다. 불안에 쌓여서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움을 표현하는 의외의 놀라움이라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긍정적인 복음 말씀이었는데 그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불편한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즉 복음이라는 가르침은 아주 긍정적인 것이죠. 그런데 그런 말씀을 듣고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놀라움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움 뒤에 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놀라움입니다. 우리가 오늘 배워야 할 놀라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놀라셨다는 말은 타우마조인데 타우마조는 존중하다/공경하다/우러르다/숭배하다/예우하다/동경하다 등의 의미가 있는 놀라움입니다. 그러니까 이 놀라움은 긍정적이고 희망차고 경탄을 자아내는 놀라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놀라신 이유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믿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의미합니까??? 부정한다는 의미죠. 그런데 그들이 믿지 않아서 예수님이 놀랐는데 예수님께서는 긍정적이고 희망찬 놀라움, 즉 존중하고/공경하고/우러르고/숭배하고/예우하고/동경하는 표정으로 놀라움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믿지 않으면 당장에 얼굴빛이 변하여 노기를 띤 모습으로 놀라셔야 할 텐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탄을 자아내는 모습으로, 인자한 모습으로 놀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나에게 해가 되고 불편함이 가해졌을 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의 놀라움은 일반적인, 인간적인 놀라움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적인 놀라움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초월적인 놀라움이란 부활을 목격했던 제자들과 관련이 있는 놀라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 놀라는 장면이 드러나는데 특히 루카24,41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타우마조)” 했을 때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놀랐던 것도 오늘 예수님처럼 믿지 못해서 놀라는 장면이었는데 그러한 제자들의 초월적인 놀라움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미리 앞당겨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는 말은 그들이 병들고 아픈이라는 것을 전재하는 놀라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도 건강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픈 사람의 믿지 않음에 놀라셨다는 것은 병들고 고통받고 허약한이를 존중하고/공경하고/우러르고/숭배하고/예우하고/동경하는 지극히 자비롭고 관대함을 표현한 놀라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는 것은 의심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공경하고 예우한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도마 사도가 의심했을 때에 그에게 괘씸해 하기보다 친히 그에게 나타나시어 그가 원하는대로 보여주시고 만지게 해 주십니다.(요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구운 물고기도 친히 잡수십니다.(루카)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로나다”(루카24,39)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나약함 부족함 부끄럽고 면목없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표현이 바로 나다라는 상징적인 말씀이 아닐까합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한 일은 먼저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을 받아들일 때에 가능할 것입니다. 자신의 뚫린 손과 발, 찢긴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준다는 것은 자기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부활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창립자께서 “DF-그리스도께서 내안에 형성될 때까지를 시작할 때 서두에 성아우구스티노의 기도를 적어놓았습니다. 이 기도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기도인데 이 기도를 토대로 창립자는 자신을 비추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지극히 우연적인 존재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 자다.’ 너는 영혼과 육체에 관해 아무것도 아니다. 존재와 활동에서도 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 스스로는 지극히 불완전하다.” (DF18)

창립자께서는 이러한 자기 성찰이 바로 성부 하느님을 닮는 여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하느님처럼 생각하고 하느님처럼 말하고 하느님처럼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쁠때에도 하느님처럼 기뻐하고, 슬플때에도 하느님처럼 슬퍼하고, 놀랄때에도 하느님처럼 놀라워해야 하겠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

주 예수님, 제가 저 자신을 알고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 외에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원하지 않게 하소서.

저를 미워하고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게 하소서.

저를 낮추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겠나이다.

저를 낮추어 당신 안에 살게 하여 주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받아들이게 하소서.

저를 박해하고 당신을 따르며

늘 당신을 따르고자 하나이다.

제게서 도망쳐 당신께 피신하여

당신의 보호를 받기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들 사이에 머물기 위하여

저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신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저를 의지하지 않고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께 순명하게 하소서.

당신이 아닌 그 무엇에도 애착하지 않고

당신을 위해 가난한 자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까지 저를 보살펴 주소서.

제가 당신을 뵈올 수 있도록 저를 불러주시고

영원히 당신을 즐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