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8,1-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천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기적을 베푸실 때에 빵과 물고기를 축복하는 장면이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다른 복음에서 전해주는 장면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네 복음을 통틀어서 빵의 기적은 모두 여섯차례 나온다고 했는데 오늘 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빵과 물고기를 따로 축복하시고 따로 나누어 주십니다. 마르코를 제외한 세 복음서에서는 단 한차례의 축복으로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줍니다. 빵과 물고기를 양손에 들고 동시에 축복해서 한 번에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서는 제자들이 가져온 빵과 물고기 중에서 물고기를 빼고 빵만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시는 것이 좀 특이합니다. 빵은 그만큼 우리 구원의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빵과 물고기를 들고 따로 감사와 축복을 드리신 것을 두고 성서학자 세르지오 브릴리아는 마르코복음의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이방인과 유다인의 일치를 보여주는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는 장면에서 “감사(에우카리스테사스/에우카리스테오)”는 그리스식 표현이고, “축복하신 다음” 물고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축복(에우로게사스/에우로게오)”은 셈족의 전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린 것은 이방인들이 유다인의 식탁에 초대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물고기를 들고 축복하신 것은 유다인들도 이방인의 식탁에 초대되었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목적은 이방인 지역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은 유다인과 이방인에게 골고루 드러나는 구원활동의 보편성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다계 공동체와 그리스계 공동체가 같은 신앙을 공유하고 같은 성찬례를 거행하는 교회의 상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빵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한가지 조건. 그것은 굶주린 군중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인간의 탐욕을 경계한 것입니다. 굶주리지 않았는데 먹는 것은 탐욕입니다. 따라서 굶주린다는 것은 모든 욕심을 이긴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무거나 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굶주림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빵의 기적의 원천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빵이 차려진 천상의 잔치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의 감사를 담아서 차려낸 우리의 빵을 이웃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감사의 신비가 일상속에서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해 2월 18일 연중제6주간 화요일 마르8,14-21 (20250218 바딸) (0) | 2025.02.18 |
---|---|
다해 2월 17일 연중제6주간 월요일 마르8,11-13 (20250217 스승) (0) | 2025.02.17 |
다해 2월 8일 연중제4주간 토요일 마르6,30-34 (20250208 바딸) (0) | 2025.02.08 |
다해 2월 5일 연중제4주간 수요일 마르6,1-6 (20250206 리디아) (0) | 2025.02.05 |
다해 1월 26일 연중제3주일 루카1,1-4; 4,14-21 (20250126 스승) (0) | 2025.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