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손이 어떻게 오그라들었다는 걸까요??? 여기서 “오그라든”이라는 말은 “크세로스”라고 되어있는데 크세로스는 마른/건조한/시든/빼빼한/거친/딱딱한 이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손이 말랐다/ 손이 빼빼하다/ 손이 딱딱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쪽 손이 마르고 빼빼하고 딱딱해지려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한쪽 손을 어떤 형태로든 힘을 준 다음에 손에 힘을 빼지말고 계속 그렇게 그 상태로 유지하고 있어야 그런 모양의 손, 마르고/빼빼하고/딱딱한 손, 오그라든 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는 사람입니까??? 안식일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까???
율법의 613조항은 하라248-하지마라365 조항으로 나누어지는데 오늘 복음에서 안식일법과 관련된 조항을 찾아보면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조항을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20,10- “안식일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레위23,32-“이날은 너희에게 안식일, 곧 안식의 날이며 고행을 해야하는 날이다.”
즉 금지된 노동을 하지 마라, 그러나 고행은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까??? 고행을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행을 하고 있다면, 지금 고행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회당입니다. 그렇다면 고행을 할 때에 회당에 들어와서 고행을 해야한다는 규정이 있습니까??? 또는 하지마라는 규정이 있습니까??? 고행은 하되 여기서 하라, 혹은 저기서 하라는 규정은 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안식일에 고행을 하라고 율법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회당 밖에서도 하고, 회당 안에서도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금지된 일인지, 금지되지 않은 일인지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바리사이들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 일을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금지 된 일이라고 보았고, 반면에 예수님은 그런 모양으로 금지된 일은 해도 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사이들은 출애20,10의 조항 “안식일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를 적용시켰고, 예수님은 레위23,32의 조항 “안식일에는 고행을 해야한다.”를 적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노여운 눈으로 그러한 그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리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뻣어라”하고 말씀하셨고, 그가 손을 뻣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 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손을 뻣어라"는 말씀은 그러한 "고행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니 원래대로 건강하게 되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손이 성하여지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합니다.
이러한 애매한 상황을 잘 알고있던 바리사이들은 물러가서 모의한 끝에 그러한 상황을 또 한차례 만들어서 예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어떤 시험입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만들어 올가미를 씌웁니다. 그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
그리고 오늘 복음 바로 전 장면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로 한차례 올가미를 씌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사이를 가로질러 회당에 가는 길이었는데, 길을 내고 가면서 밀이삭을 뜯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며 고발했던 장면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7)
이렇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고쳐주시는 장면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애매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인가?에 관한 모범답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쳐주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고 고쳐주지 않아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일에 직면했을 때에 이를 묵인하고 덮어 두어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의 올가미에 묶여 있는 사람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항상 그들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드는 말씀이 논어에 있어서 옮겨 적어 보았는데 이러한 구절입니다.
"갈아도 엷어지지 않는다면 굳다고 할 수 있고,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희다고 할 수 있다."(논어제17편,양화7장) 논어의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매일 식탁에 자리하셨으나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날마다 율법 속에 있었으나 율법에 물들지 않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창립자 알베리오네 신부님께서는 영성생활이 한쪽으로 치우쳐져서는 올바른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회 협력자들은 누구든지 기도나 공부 사도직이나 청빈의 생활이 서로 균형잡힐 때에 안정적인 모습으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창립자의 네바퀴영성을 모토로 삶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복음선포의 원동력인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마음이 당신의 모습으로 형성되어 성바오로가 선포했던 예수님과 일치되는 참으로 균형잡힌 제자로 활동하는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해 1월 24일 연중제2주간 금요일 마르3,13-19 (20250124 성바) (0) | 2025.01.24 |
---|---|
다해 1월 23일 연중제2주간 목요일 마르3,7-12 (20250123 전주협력) (0) | 2025.01.23 |
다해 1월 8일 주님공현후 수요일 마르6,45-52 (20250108 리디아) (0) | 2025.01.08 |
다해 1월 5일 주님공현대축일 마태2,1-12 (20250105 바딸) (1) | 2025.01.05 |
다해 1월 3일 금요일 요한1,29-34 (20250103 행운동성당) (0) | 2025.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