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3,7-12
오늘 복음에서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호숫가로 몰려들었습니다. 갈릴레아 사람들을 비롯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건너편,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 큰 무리가 호숫가로 몰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군중들이 호숫가로 몰려들도록 하셨을까요??? 호숫가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하셨을까요??? 호숫가가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에 회당에서 나오시어 광야로 가지 않으시고 혹은 산으로 올라가지 않으시고 호숫가로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가신 것은 오늘이 세 번째입니다.
처음으로 호숫가로 가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제자를 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뒤에 갈릴레아에 가시어 첫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그런 다음 곧바로 가신 곳이 호숫가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공생활을 함께할 첫 제자를 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호숫가가 아닌 갈릴래아 인근 마을에는 제자로 선발할 만한 사람이 없었을까요??? 아니면 갈릴래아 사람들이 모두 호숫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닐것입니다. 땅을 일구는 농부들도 있었을 것이고, 양을 치거나 가축을 키우는 목동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첫 복음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호숫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당신께 귀를 기울이고 당신께 눈을 맞추며 당신의 복음선포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한 관심있는 반응을 보시고 예수님은 첫 제자를 호숫가에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호수에 가셨을 때를 생각해보면 언제입니까??? 그것은 세관에 앉아 있던 알페오의 아들 레위를 또한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세 번째로 호수에 가셨는데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바에 의하면 많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호수로 몰려왔던 사람들의 무리는 각각 일곱지역에서 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곱지역을 어디라고 했습니까??? 갈릴래아/유다/예루살렘/이두매아/요르단건너편/티로/시돈 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생각을 바꾸십니다. 이번에는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지 않으십니다. 이어지는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서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산에 오르시어 열두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세차례에 걸쳐서 호숫가에 가시어 사람들을 모으시고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신 다음에는 아예 호수를 중심으로 복음선포 활동을 이어가십니다. 호수 이쪽 저쪽으로 건너다니시며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호수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일곱 지역을 차례로 방문하십니다. 마르코복음을 쭉 읽어보면, 가장 먼저 순례하셨던 곳은 당연히 온 갈릴래아 호수 주변 마을들입니다. 그리고 티로와 시돈을 거쳐서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을 돌아 유다지역으로 가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당신의 공생활을 마치시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특히 유심히 보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수에 몰려들었던 군중들인데, 이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아픈사람과 건강한 사람입니다. 아픈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소개됩니까??? 치유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손을 얹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 앞에 업드려서 어떻게 했던 사람입니까??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에서는 비록 땅에 엎드린 이들을 일컬어서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이라고 명명했지만 사실은 이들은 복음선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인물들로 모아집니다. 사실 모든 복음서(네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는 핵심교리가 있는데, 그건 바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선포내용입니다. 아예 마르코복음은 복음을 시작할 때에 복음 첫 구절(마르1,1)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 엎드려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은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이라고 소개되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에수님을 반대했던 바리사이들의 다른 점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변화가 됩니다. 어떻게 변화됩니까??? 차츰차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바리사이들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증명해 보라며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전형적인 모습이 누구입니까??? 베드로와 유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마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렇게 이렇게 해야한다"하고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건 당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시기”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예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픈 사람과 성한 사람을 하나로 일치시키십니다. 그들이 비록 몸은 아프고 불안하고 세상 불만족스럽지만 그들 활동의 원동력인 지성과 의지와 마음만은 당신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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