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21주간 수요일 마태23,27-32 (240828 행운동성당)

jasunthoma 2024. 8. 28. 05: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에 관해서는 모두 다섯차례 밝히십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으심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직접 예고하신 것이 세 번이고 21장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지 한 번 암시하시고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하는 말이 거짓된 증언임을 밝히시면서 이제는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암시적으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느님 구원의 놀라운 표징입니다. 일찍이 성전에서 봉사하던 시메온이 증언했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들의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이스라엘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는 놀라운 하느님 구원의 표징입니다. 즉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분이시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 또한 그러한 반대받는 표적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하느님 구원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예언자들과 성경말씀을 따르는 것과,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나자렛 목수의 핀잔 정도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종교를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수단으로 바꾸고, 본질적인 것, 즉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제쳐두고 부차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바꾸는 지도자들을 비판십니다. 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들과 예수님을 돕는 이들을 죽이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이름이신 예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우리들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했습니다. 침통한 표정을 지은채 무덤을 치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 바꾸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아름답고 경건하게 가꾸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꼿꼿이 서서 양팔기도를 즐겨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모세의 기도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위선적인 기도를 따라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탈출17,12)"카테드라καθέδρα(의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싸울때에 모세가 쳐든 손을 내려오지 않게 모세 발 아래 돌을 받쳤던 의자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모세를 그 곳에 앉혀서 팔을 잡아주었는데 그때 앉았던 모세의 자리가 카테드라입니다. 기도하는 모세와 원수에 맞서 싸우는 여호수아가 서로 연동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지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다고 했습니다. 기도와 전투는, 말과 실행은, 정신과 육체는, 생각과 활동은 서로 연동되어 있어야 합니다. 양팔기도를 드리려면 한가한 길 모퉁이가 아니라 전쟁터와 같은 장터에서 양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지그 쾨더 신부님의 "육화강생"이라는 성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모세는 양 팔을 들고 있는데 양손에는 십계명판을 들고 있는 장면으로 그려졌습니다. 이 성화에서 세 사람이 양팔을 들고 있는데 가장 아래에서 아브라함, 그 위에 모세, 그리고 성모님이 아기 예수를 양손으로 들고 있고 아기 예수님이 양팔을 들고 있습니다. 창립자 복자 알베리오네의 네바퀴에서 기도와 공부는 가난과 사도직으로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말을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도직을 위해서, 청빈한 봉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 구원에 도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