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두려워 말고 박해를 각오하며, 솔직하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 즉, 영혼은 불멸한다는 의미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영혼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시는 분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어서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뭐가 남을까요??? 영혼이 남슴니까??? 그러면 육신이 죽고 사라진 후에 남은 영혼은 무엇일까요??? 영혼은 말씀과 빛의 터전에 머무는 하느님의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과 빛의 터전을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처음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에 하느님이 하신 최초의 일은 말씀을 하신 일입니다.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빛이 생겨라!” 그러자 빛이 생겼습니다. 이 최초에 있었던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요한1,1+에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빛이 생겨라!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으면 빛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과 빛은 태초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고 선포하는 증인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말씀(소리)을 하지 않고, 그 말씀에 따라 빛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느님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있다없다, 많다적다를 따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인즉슨 당신 홀로 계셨지만 그 홀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느님께서 선포하신 "생겨라!"라는 최초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렵고 조심스러운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알리는 최초의 복음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복음 선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소리를 내지 않으면 우리 주변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복음 선포를 실천할 수 있는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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