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14주간 수요일 마태10,1-7; 루카6,12-19 (240710 리디아// 241028 부산협력)

jasunthoma 2024. 7. 10. 04:59

사도(아포스톨로스ποστολος)는 아포스텔로ποστελλω(보내다,파견하다)라는 동사에서 그 어원(語源)이 유래되었습니다. 구약성경(LXX)에서 아포스텔로ποστελλω는 히브리어 쉘라שלח의 번역어로 70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ποστελλω/שלח는 대개 메시지나 임무의 위임에 관련되었고, 특별히 사자(使者)를 보내는 것을 지칭하였습니다. 이때 강조점은 파견한 사람에게 있습니다(1사무6,8). 파견받은 사람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파견한 사람의 뜻과 그를 대리할 때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파견받은 이아포스텔로ποστελλω는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약 135회 사용되었습니다.(대부분 사도행전에서 사용됨) 이 단어의 의미는 일상적인 의미보다 오로지 문맥 안에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권위를 대리하고, 당신을 섬기도록 파견자를 보내는 것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

사도의 모후-마리아 (창립자 알베리오네)/ 사도의 사도-마리아막달레나 (히폴리투스 교부)

일꾼 (에르가테스-숙련공,노동자,유급/ 디아코노-봉사자,관리자,무급)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뽑으시어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열두 사도를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열둘을 뽑으시고, 또 열둘을 파견을 하셨을까요??? 뽑으신 목적/ 파견하신 목적???

먼저 열둘을 뽑으신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상징적인 두 지파만이 남았음을 상기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입니다. 솔로몬왕이 죽고나서 나머지 지파들은 우상을 숭배를 하며 다른 신들을 믿는 이교지역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그리스화 되면서 유일하게 유다지파만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리스화 된 지역으로 파견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집안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 지역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길을 잃은 양들과 같은 나머지 10지파가 모두 유다와 벤야민 지파에 모여있었음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2역대11,13+에 의하면 솔로몬 왕이 죽자 북이스라엘에 있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저마다 살던 고장을 모두 버리고 남유다 르하브암에게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북쪽 통치자가 그들을 주님의 사제직에서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유다와 벤야민 지파에는 길을 잃고 허약해진 10지파가 모여있게 되었는데, 유다지파가 쫓겨난 이들의 요람 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 열둘을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에 열두지파의 하느님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스라엘 집안으로 파견을 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과 이교지역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온 갈릴레아 지방을 비롯하여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까지 두루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길을 잃은 이스라엘 집안에만 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집안에는 다른 열지파에서 쫒겨난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모여들어 길을 잃고 허약해진 양들처럼 흩어져서 야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자들이 파견되는 지역은 선교하기가 쉬운 지역일까요??? 어렵고 까다로운 지역일까요??? 쉬운 지역이 아닙니다. 그들은 배교하지 않으려고 유다지파에 와서 더부살이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열두제자는 그런 곳에 파견되는 것입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서 상처받고 쫓겨난 사람들에게 파견되는 것입니다. 오죽 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10,16)하고 말씀하셨을까요. 당신이 제자들에게는 불편한 지역으로 보내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당신이 제자들에게는 단식하기를 원치 않으셨지만,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외딴곳에 가서 좀 쉬기를 원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을 불편한 지역으로 파견하시고, 단식하는 집으로 보내시고, 율법에 따라 쉼 없이 기도하는 집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어떻게 준비시켜서 파견하십니까??? 무장을 시켜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무장해제를 시키십니다. 사도로서 통치자로서 파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내십니까??? 일꾼으로, 종으로 보내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10, 9-11) 하지만 권한도 주십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잘 선포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세가지 권한을 주시어 파견하십니다. 먼저 당신을 가까이 부를 수 있는 권한입니다. 사제직입니다. 사제직은 하느님을 초대하는 권한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권한입니다.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은 축복의 말을 하는 권한입니다. 마지막으로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권한입니다. 왕직입니다. 왕직은 회복시키고 쉬게하는 권한입니다. 이 세가지 권한은 사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그리스도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권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권한을 부여하셨을까요??? 그 당시 유다 땅에는 하느님을 부르는 사제들이 없었습니까??? 그리고 예언직을 수행하는 예언자가 없었습니까??? 또는 이스라엘에는 통치하는 왕이 없었습니까??? 아니죠. 아주 세련되고 출중한 산헤드린 사제단이 있었고, 세상의 모든 지혜를 통찰하는 예언자들이 있었고, 힘 있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여한 권한보다 훨씬 더 다양한 통치권이 있었고, 예언자들이 있었고, 수 많은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많지도 않은 열둘을 따로 뽑으시어 아주 단촐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세가지 권한만을 부여하셨을까요???? 왜 그 세가지만 가지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을 집으로 파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이나 사회나 국가가 아니라 한 집안, 한 가정, 한 울타리로 파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가정에서 새로운 복음의 씨를 싹틔우기 위해서입니다. 길바닥이 아니라, 돌밭이 아니라, 가시덤불 속이 아니라 처음부터 좋은 땅에서 복음의 씨앗이 자라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떡잎이 다 좋으면 어떻게 알아봐야 할까요??? 물을 줘보면 압니다. 그늘진 것을 거두어내고 빛을 쪼여주면 압니다.

일곱 형제가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아주 훌륭한 모범학생들로 평가되어 있는 떡잎이 좋은 형제들이었습니다. 이 형제들에게 수도원 규칙은 아주 단순하고 쉬웠습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미사드리고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성체조배하고 끝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일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끝까지 수도생활을 할 수 있는 형제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까요???

용돈을 줘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용돈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형제가 장차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형제인지 아니면 수도생활이 아니라 개인 생활에 관심이 있는지를 용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일곱중에 두 형제가 있었는데, 이 두 형제는 용돈이 항상 모자라서 월말이 되기 전에 추가로 더 타갔습니다. 한 형제는 용돈을 모아서 몰래 핸드폰을 사는 데 썼습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는 몰래 학교 동기들과 간식을 사먹는데 썼습니다. 첫번째 형제는 핸드폰이 생기고 나서 수도원 규칙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뭐가 떠올라서 그렇습니까??? 헤드폰/ 워치/ 우퍼/ 노트북 등) 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도하고 미사드리고 묵상하던 단조롭고 쉬웠던 규칙들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형제는 기도시간 이외에도 시간이 날 때면 성당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 둘 중에 누가 수도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형제일까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베푸는 형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베풀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배려심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남에게 베풀어보시면 어떻게 됩니까??? 기쁨이 커지지요. 자신이 아니라 형제에게서 기쁨의 열매를 맺는 이가 수도생활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배려심 없이는 한 공동체가 서로 어울릴 수 없고 먼저 자기 자신이 건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볼품없어 보이는 세가지 배려하는 권한(하느님을 초대하는 권한/ 축복을 빌어주는 권한/ 쉬게하는 권한) 을 주신 것은 우리의 작은 울타리인 한 공동체, 한 가정, 한 집안이 건강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영혼과 육신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부여된 삼중권한으로 하느님 이름을 마음껏 부르고, 서로 축복을 해주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사랑의 성가정을 만드는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사도적 은총을 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