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몰려온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두 가지 반응이 나왔습니다. 먼저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제자 한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학교 선생님이라서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는데 한사람은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달라고 대답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둘다 “예”하고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호수로 건너가라는 명령에 토를 달았습니다. 가겠습니다 하고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만을 따라 가겠다는 것이고, 그리고 당신의 제자는 부모님 장례를 먼저 지낸 다음 명령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1차적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흔쾌히 따른 제자는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따르겠다고 말한 사람은 율법학자였는데 그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러니 너는 나를 따르지 말고 먼저 집으로 가거라 네가 집에서 해야 할 일을 하여라 하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비유입니다. 율법학자에게는 너는 안되겠구나 하고 돌려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한 제자에게는 “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는 당신의 명령을 따를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장사를 먼저 지내게 해 달라는 그의 청원은 죽음을 각오한 이가 길을 떠날 때에 마지막 할 본분을 하도록 청하는 비장함이 느껴지는 간곡한 부탁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이 가리키는 것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죽은자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선택하든지 생명을 선택하든지 모두 우리의 결단으로 결정됩니다. 내가 생명을 선택한다면 내가 가는 곳이 죽음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나로 인해서 생명이 길이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두번의 물을 건넜습니다. 첫번째 물은 홍해 바다였습니다. 두번째 물은 카데스 광야에서 건넜는데 지렛시내였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물은 요르단강이었는데 모세는 이 요르단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르단강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느보산에서 요르단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생동안 세가지 강을 건너간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출생의 강이고 둘째는 세례의 강이며 셋째는 부활의 강입니다. 이 세가지 강의 끝은 모두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호수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건너가기를 두려워했던 호수 건너편은 우리에게는 어떤 곳일까???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하신다면 과연 나는 명령을 따를 수 있을까???
우리가 건너가야 할 곳의 종착지는 언제나 생명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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