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불리게 되었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불리게 되었는지 잠시 생각해보는 것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을까?입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에 제 이름의 첫자를 지어 주신 분은 제 외할아버지입니다. 당신의 함자는 끝자리에 “얼굴 용”자를 쓰셨는데 제게는 첫자리에 “용 용”자를 붙여주셨습니다. 당신의 함자가 “금”자 “용”자 “금용”이신데 제 이름은 “용석”으로 지어주셨습니다. 금용은 “지금 얼굴”이라는 뜻이고 용석은 “용 주석(구리)”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즈카르야라고 부르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아기를 요한이라고 불러야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요한의 이름은 “하느님의 은총” 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은 이”라고 합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약속을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바뀐 것입니까??? 하느님의 약속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로 바뀐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요한이라고 불러야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이제는 그의 아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탄생(12월 25일)을 6개월 앞두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는 축일을 먼저 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정확히 하루를 뺀 여섯달 차이가 납니다. 이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은 다만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는 즈카르야의 노래만을 전해줄 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탄생하기까지 6개월동안 요한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속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요한에게도 주님의 성령이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의 이름대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요한에게 머물렀습니다. 그 6개월 동안... 왜냐하면 요한이라는 이름을 쓰고 난 뒤에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차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때부터 줄곧 성령의 보호아래 머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족보상 이별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성령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단락에서 아기인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르심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에는 메마른 광야에서 살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이별을 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요한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이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줄곧 성령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광야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는 늘 성령과 함께 있기 위하여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들은 것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곧장 성급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들었던 것을 볼 때까지 기다립니다. 결국은 들은 것을 선포하게 되지만 들었다고 들은 모든 것을 선포했던 것은 아닙니다. 들었던 음성이 눈에 보이기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며 자신은 보았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제는 성령이 계속해서 자기에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 자신을 떠나서 다른 이에게 머무르는 성령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증언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3-36) 여기서 “보았다”는 “호라오”인데 호라오는 주의를 기울여서 보다/ 신경을 쓰면서 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성령이 내리는 것을 자세히 보았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시메온 또한 요한처럼 증언한 바가 있습니다. 시메온은 자기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서 주님의 성전을 한 시도 떠나있지 않았습니다. 시메온이 마지막 날 주님(아기 예수님)을 뵈옵고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으니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하고 노래한 것과 같이 세례자 요한도 주님을 보고 흐뭇해 하며 이제는 감옥에 같히는 것도 그리고 참수를 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을 보았던 이가 한사람 더 있습닏. 성바오로입니다. 성바오로 사도는 자기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서 이방인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오로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의 성령이 자기자신에게 파견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시는 성령 또한 보았습니다. 일찌기 요한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입고 이 세상에 파견되었으며 부모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주님의 성령의 기운속에 머물러 있었듯이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이 보이기까지 줄곧 힘든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시메온처럼 사도 바오로처럼 세례자요한이 증언하듯이 “과연 나는 보았다”하고 우리 또한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이 뭐때문에 자기에게 머물던 성령이 예수님에게 내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을까요???(요한1,33-36) “나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세례자 요한은 물로 세레를 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의 세례는 죄를 사해주지만 성령의 세례는 한 가족이 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군중들이 한가족이 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성령 안에서 우리 자신의 소명을 살펴보고 이를 잘 간직하여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을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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