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사순제2주간 토요일 루카15,1-3.11-32 (240302 바딸// 250330 성바)

jasunthoma 2024. 3. 1. 17:13

루카15,1-3.11-32

오늘 복음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입니다.

새번역성경- "되찾은 아들"//

공동번역- "읽었던 아들"//

예루살렘버전- "방탕한 아들과 충실한 아들"//

소비카인의 라틴아메리카버전- "방탕한 아들"//

소비카인의 빠스또랄버전- "되찾은 아들"//

그리고 각 성경마다 다양한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Viviente- "잃었던 아들"// Lenguaje Actual- "자애로운 아버지"// La Palabra- "두아들과 선한 아버지"// Dios Habla Hoy- "되찾은 아들의 아버지" 제 개인적으로는 [돌아온 탕자!]가 가장 적합한 제목이 아닐까합니다.

잃었던 아들 이야기는 곧 방탕한 아들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사실은 잃었던 아들이 아니라 방탕한 아들과 충실한 아들이라고 해야 전체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제목을 "잃었던 아들" 혹은 "되찾은 아들"이라고 하며, 한 아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를 복음맥락 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루카15장 전체를 볼때에 오늘 복음에 앞서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가 소개됩니다. 그리고 이 두 비유 다음에 이어지는 비유로 잃었던 아들이라고 해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메시지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네명인데 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두 아들, 즉 작은아들과 큰아들입니다. 이 두 아들과 관련된 핵심 구절은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즉 큰아들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이야기 중에 말씀하신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이 말씀은 형은 죽지도 않았고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동생만 죽도록 고생했습니까??? 물론 비유로 하신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실재로 아우가 죽었습니까??? 아우도 안죽었습니다. 죽도록 고생했지만 죽지는 않았지요. 실재로 누가 죽었습니까??? 등장인물들 중에는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죽었습니까??? 살진 송아지가 죽었죠. 살진 송아지가 유일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아우대신 죽은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살진 송아지는 시태우톤 모스콘 σιτευτόν μόσχον(루카15,30)입니다. 시태우톤σιτευτόν의 원형 시토스σιτος는 곡물 밀 보리 빵 음식 등을 의미합니다. 즉 시태우톤은 풀을 먹인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는 좋은 음식인 곡물을 먹여서 살을 찌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송아지는 모스콘μόσχον인데 모스콘은 길들여지지 않은 두살의 수송아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고 일렀을 때에 살진 송아지는 두 마디로 따로 사용하는데 송아지 살진”(15,23-아버지. 15,27-)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종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버지에게 항변하듯이 따질 때에는 “(그) 송아지 (그) 살진이 아니라 그 살진 송아지로 붙여서 한 단어로 말을 합니다. 즉 아버지가 말한 살진 송아지는 두 단어를 따로따로 띄워서 말했기에 실재로 살이 찌지 않았을 것만 같은 “(그) 송아지 (그) 살진” 인데, 이는 앞으로 살이 찌워질 송아지였음을 알려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송아지~ 그 살진"

작은 송아지가 살이 쪄봐야 얼마나 살이 졌겠습니까??? 하지만 큰아들은 그렇게 전해듣고도 자기입으로 말할 때에는 송아지가 토실토실하게 살이 쪄 보였던지 "살진 송아지" 시태우톤 모스콘 σιτευτόν μόσχον(루카15,30)이었다고 본 것이지요. 얼마나 아우가 미웠으면 삐쩍마른 동생을 보고도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었을까?십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품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내 죄를 대신해서 죽어야하는 생명이 있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내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고 신실하게 살고 있는 아들이라면 반드시 소외된 아들이 있음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소외된 아들이 나를 신실하고 충실한 아들로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큰아들과 유혹에 넘어간 작은아들을 둘 다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 아버지의 자애를 우리 마음에 지니고 형제를 사랑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