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사순제2주간 월요일 루카6,36-38 (240226 부산협력// 250317 성바)

jasunthoma 2024. 2. 25. 21:4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비로운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요??? 먼저 자비로운 사람은 오늘 예수님께서 주어라, 그리고 용서하여라 하신 것처럼 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주고 또 누구를 용서하는 사람입니까??? 원수에게 주고 또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원수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방인인 원수에게 그렇게 주었습니까???

성경에는 이방인에게 용서를 베풀어 준 네 명의 유다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다/ 살몬/ 보아즈/ 다윗입니다. 이 네명의 유다인이 네명의 이방인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이방인 여인들이지만 유다인에게 용서받은 이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 특히 후하게 베풀어 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룻기에서 보아즈가 룻에게 후하게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보아즈의 후하게 베푸는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되질하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룻기에서 보아즈가 룻에게 보리 여섯되를 너울에 담아주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에서 "되"는 "메트론μέτρον"인데 메트론은 무게를 규정하는 측정 단위이기도 하지만 길이와 폭을 재는 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룻이 곡식을 받기 위해서 앞으로 펼쳤던 너울은 머리까지 덮어서 어깨에 걸치는 어깨수건이었습니다. 즉 어깨에서부터 끌어 담을 수 있는 품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되질을 한다는 것은 품에 안긴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품은 되질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용서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안아준 아버지의 품처럼 말입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품을 흔하게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인사하게 될 때에 목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한 사람 품에 안겨 만남을 기뻐하거나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적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하지 않은 사람을 품어주었던 적은 없었을까요???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였을까요??? 서원했을 때가 아닐까합니다. 나를 원수로 여기던 형제마저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의미로 나를 후하게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을 품는 마음으로 우리의 형제를 후하게 품어주는 하루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타마르가 유다에게 낳아 준 페레츠 집안처럼 되기를 기원하오(룻4,12). . . 이것이 페레츠의 족보이다.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고, 헤츠론은 람을 낳았으며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다.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고 나흐손은 살마를 낳았으며, 살몬은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을 낳았다." (룻4,18-22; 마태1,3-6)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낳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하고 말하였다."(룻4,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