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6주간 화요일 루카9,51-56 (231003 성바// 241001 스승)

jasunthoma 2023. 10. 3. 05: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고 전해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실(아날렙시스) 때가 찼다고 했는데 이는 곧 승천을 의미합니다. 이 승천 또는 오르심은 2열왕2,9-11에서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은 엘리야의 승천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두가지가 다릅니다. 먼저 승천 장소가 다릅니다. 그리고 승천 방법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는 마르코/루카/사도행전에서 각각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 (열한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반면 루카복음에서 알려주는 예수님의 승천 장소 (베타니아)는 엘리야의 승천장소인 요르단강과 닮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올리브산)에서는 엘리야의 승천 장소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승천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고통스러운 십자가 매달림의 마지막날이자 영광스러운 당신 부활의 첫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신 것은 승천 이전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당신 몸소 이루시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은 이 모든 과정을 당신 영광의 신학 안에 포함한 승천이라는 점이 엘리야의 승천과 다른 점입니다.

먼저 엘리야의 승천 방법을 보면 이렇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2열왕1장과 2장에서 상세히 전해주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임금이었던 아하즈야가 자기 옥상방 전망대 난간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에 자기 병이 회복될 수 있는지를 엘리야에게 물어보지 않고 에크론의 신 베엘제불에게 물어보러 간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엘리야는 하늘에서 두 차례의 불을 내려 아하즈야 임금의 오십인대장 두명과 그들의 부하들을 불살라버렸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엘리야는 어디로든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실로에서 가까운 길갈을 떠나 베텔로 그리고 베텔을 떠나 예리코로 이어서 예리코를 떠나 요르단 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요르단 강가에 이르러 자기 겉옷을 들어 말아가지고 요르단 강 물을 내려치니 물이 이쪽 저쪽으로 갈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너가서 요르단 강 동쪽에서 승천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지 않고 가장 낮은 예리코 건너편 이방인 지역에서 승천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제자 엘리사에게 소원을 청하여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스승님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하자 엘리야는 너무 어려운 소원을 청한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자신을 데려가는 것을 보게되면 그가 청한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하면 그리 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곧 엘리야는 제자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불 병거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덕분에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렸던 것입니다. 즉 엘리야는 요르단강물을 가르며 회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방법은 엘리야와 사뭇 다릅니다. 먼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에 관하여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람의 아들의 들어올림(휩소티)입니다.

특히 요한12,32에서 사람의 아들의 들어올림은 오늘루카복음에서 전해주는 예수님의 승천(아날렙시스)이 어떻게 당신 영광의 신학 안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줍니다. 이는 유다인들이 알고 있던 승천 개념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들어올림을 설명하실 때에 사람의 아들은 들어올려져야 한다며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끌어들일 것이다” 여기서 땅에서 들어올려져야하다고 했습니다. 즉 모세의 구리뱀처럼 땅에서 들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뱀에게 원죄의 딱지를 붙치며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과 관련됩니다. 네가 사는 동안 너는 배로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죄의 딱지가 붙은 뱀에게 특별한 동정심이라도 있는 것처럼 당신 또한 뱀처럼 기어다니며 먼지를 먹다가 광야의 구리뱀처럼 들어올려져야 한다(요한3,1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들어올려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결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마리아를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지 않으려면 요르단강 동쪽으로 건너가서 데카폴리스와 페레아 두 지역을 지나가야 유다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가장 안전하고 빠른길은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려하지 않았다고 전해줍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동쪽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통행허락을 하지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엘리야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엘리야가 했던 방법과는 다르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엘리야의 길을 거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가 아닌 비신자들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정의롭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몸소 실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비해 선호도가 높다고 해서 우리 개인의 선호도가 높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당신이 선택하신 선한 방법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평화로운 방법인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괄하는 당신 영광의 신학이 우리를 비추어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한 모습으로 비치고 또 그들에게 그런 좋은 감정이 일어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선호한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