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연중제27주간 수요일 루카11,1-4 주님의 기도 (20231011 리디아)

jasunthoma 2023. 10. 11. 05:02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요 며칠은 기온이 쌀쌀해졌습니다. 엊그제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몇 해전에 비가 오지 않아서 강원도 춘천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비를 기다리다 못한 마을 주민들은 춘천시장님을 비롯하여 인근 사찰 주지스님을 모셔다가 비를 내려주십사고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물을 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서울에 비가 왔다고 합니다. 정작 기우제를 올린 춘천지역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경기도에만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우제와 관련하여 짧은 예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는 것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예화는 마산교구 신은근 신부님의 말씀으로 걷는 하룻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마을에 가뭄이 극심하여 모두가 기우제를 지내려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에 올라 정성을 다해 제단을 쌓고 가져온 제물을 한상차려서 하늘을 우러러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곧이어 우르릉 쾅!! !!! 하면서 비가 따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이장님을 비롯하여 어르신들은 비를 피하느라 우왕좌왕하며 갈팡질팡하였습니다. 너도나도 비를 피하려고 인근 소나무 아래로 삼삼오오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꼬마 아이가 우산을 척!!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눈이 휘둥글해지며 저마다 한마디씩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어찌알고 우산을 챙겨왔느냐?" 이에 꼬마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어르신들은 어찌 우산을 챙기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주님의기도를 토대로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에 비춰본다면 기도란 다름아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주님의 기도한 가운데 구절에 해당하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하는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왜 거룩하고 신성한 기도, 주님의 기도에 양식을 달라는 구절이 들어갔을까요???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라면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무엇 때문에 주님의 기도에 너무나도 흔한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하는 구절이 들어갔냐는 것입니다. 기도문이 그렇다면 그럼 일용할 양식은 얼마만큼 구하는 것이 일용할까요? '일용할 양식'의 합당한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요? 누구는 조금만 먹어도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이는 많이 먹어야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애매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불신과 오해 그리고 모든 잘못과 유혹은 이 일용할 양식의 이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갈아 먹고도 만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렙타의 과부는 밀가루 한 줌을 가지고도 나눠먹고 만족하여 배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복음적으로 합당하게 두루두루 공평하게 먹어서 만족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먹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는 양식, 먹으면서 죄를 짓지않고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이를 용서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양식, 먹으면서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일용할 양식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면 기도를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께 합당하게 청할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은 무엇 밖에 없습니까??? '성체'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 이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하느님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 나 자신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양식은 없습니다. 성체만이 유일하고 참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것은 덤으로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와 기도를 하는 목적은 모두 천상의 양식인 성체를 영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성체로 신적일치를 이루면 다시 깨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깨어나다는 말은 탈리타쿰과 같은 의미인데 탈리타쿰은 무슨 뜻입니까??? 마르코복음 541절에 나옵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탈리타쿰” “소녀야 일어나라는 아람어인데 이를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게이레γειρε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리고 루카7,11에서 나인이라는 고을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또한 같은 단어 에게르떼띠γέρθητι입니다. 에게이레와 에게르떼띠의 원형 에게이로γείρω는 깨다, 깨어나다, 일어나다, 일으키다, 부활시키다, 되살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당장 소녀에게 말한 탈리타쿰과 과부의 아들에게 말한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했을 때에 결정적으로 소녀와 아들이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리된 것 아닙니까???하고 말할 수 있겠죠. 백인대장의 종 이야기에서 말씀만으로 종을 낫게 한 백인대장의 믿음처럼 주님 한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까???하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픈사람 낫는 것과 죽은 사람 깨어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죽었던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백인대장의 구절과 다른점은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셨다는 점입니다. 손을 직접 잡았다는 것입니다. 산 사람 손 잡는 것은 아름답고 기쁜 일이지만 죽은 사람 손 잡는 것 쉽지않습니다. 잡을 수 있습니까??? 핏기 없는 손을 맨손으로 잡고 기도드릴 수 있습니까??? 잡고 주모경 바칠 수 있습니까??? 과연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영광송이라도 바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기도 아멘이라고 단 한마디만이라도 죽은 이의 손을 잡고 바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병자방문을 가면 늘 하던 일상적으로 손을 잡고 바치던 기도들이지만 그가 죽으면 확 달라집니다. 죽은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와 일치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들면 열왕기 상권에서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엘리야를 보면 이 장면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집에서 빵과자와 물을 얻어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지방 기근이 가실때까지 과부의 집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집, 항아리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뒤에 그 과부의 아들은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이 심해져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과부가 엘리야에게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그리하여 엘리야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받아 안고 자기가 머무르는 옥상 방으로 올라가서, 아들을 자기 잠자리에 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가 머물고 있는 이 집,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주님께 다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하시자,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의 아들을 안고 옥상방에서 집 안으로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돌려 주면서 말했습니다. “보시오, 당신 아들이 살아 있소.” 그러자 과부가 엘리야에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 이 이야기는 죽은 이가 깨어나려면 기도만이 아니라 일치됨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에게이로γείρω 즉 탈리타쿰은 깨다, 깨어나다, 일어나다, 일으키다, 부활시키다, 되살리다라고 했는데. 라자로를 살리시는 장면의 아나스타시스와 다릅니다. 아나스타시스는 능동적 자발적 깨어남(부활, 예수님처럼 깨어나는 부활)이라고 한다면 에게이로는 수동적 주입식 깨어남(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깨어남(부활)은 모두 수동적 주입식 깨어남(부활) “에게이로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꼭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까??? 하지만 그 기적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나와 그가 한 몸이 되는 일치의 접촉입니다.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 죽은이라도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 몸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앞으로도 그런 죄에 빠지려는 유혹을 물리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하며 일용할 양식을 청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성체를 영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성체를 통해서 우리는 매일 매번 다시 깨어납니다. 매번 새롭게 깨어날 날 수 있는 성체의 신비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