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성탄팔일축제내 죄없는아기순교자들축일 마태2,13-18 구약의 완성(성바)

jasunthoma 2015. 12. 29. 04:21

오늘은 죄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입니다.

그런데 아기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이라고 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냥 아기 순교자들 이라고 해도 될텐데. . . 말입니다.

만약에 아기에게 죄가 있다면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린 죄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무죄한","죄없는" 아기들을 따로 구분하는 이유는 뭘까요????

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경우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에 한해서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일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죄가 없을 수 있는 순간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느누구도 그가 갓난 아기일지라도 죄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당시 아기 예수님을 찾기위해 혈안이 되었던 고요하고 거룩한 밤 헤로데의 병사들의 고함소리에 놀라서 울음을 터뜨린 아기들의 울음 소리를 그냥 의미없는 울음소리로 보지않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죽어간 순간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탄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경위를 전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진 것인데

오늘 복음에 해당되는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는 장면과 이집트로 피신하는 장면은 루카복음서에는 생략되어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마태오 복음서에는 예수님 탄생 전 베들레헴 구유 이야기와 때가 차서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는 이야기가 빠져있습니다.

즉 루카복음서에는 헤로데의 박해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루카복음서에서는 그나마 평화로운 가정인 성가정을 그리는 반면에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위급한 가정, 위험에 처한 가정인 성가정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쓰여진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왜 아기의 구유 탄생 이야기와 때가 차서 아기의 할례와 정결례를 치르는 장면을 싣지 않고

헤로데의 박해 장면만을 실었을까요????

마태오 복음서는 헤로데의 박해 장면을 통해서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마태오 복음의 특징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실현하시는 메시아로 소개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이어 탈출기에 해당하는 이집트 피신을 다루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의 박해로 인해서 이집트로 피신갔다가 돌아오는 이 기간이 실재로는 몇년이 걸렸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정확한 건 리푸조 수사님께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제가 알 수있는 것은 루카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기간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산모가 정결례를 치르기 위햇 성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간은 40일이 지난 뒤라는 것입니다.

왠지 구약의 탈출기 기간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레위기12장에 산모의 정결례에 관하여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아기의 포피를 잘라 할레를 베풀어야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몸이 정결하게 될 때까지 삼십삼일동안 집에 머물러야한다. 몸이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찰때까지 거룩한 것이 몸에 닿거나 성소에 들어가서는 않된다'

 

그렇다면 산모가 정결례를 바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기까지 필요한 기간은 칠일에 삼십삼일을 더해서 40일이 지나야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아기를 봉헌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은 아기가 태어나고 40일이 지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고(마태오) 또는 목동들의 찬미를 받고(루카) 이집트로 갔다가 돌아와보니 헤로데를 이어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여 나자렛으로 가서 자리를 잡기까지 40일이 지난 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재로 헤로데의 죽음을 기원전 4년경으로 보고 있으니 예수님의 탄생과 맞물리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과 하느님의 정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던 마리아와 요셉의 고민을 함께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기를 살리려면 이집트로 피신을 해야하지만 산모의 산후조리를 위해서라면 율법의 명령대로 40일이 찰때까지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면 집밖을 나가서는 안되는 때에 요셉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산모의 정결례 조항을 임시로 유보합니다.

산모의 건강과 율법을 위해서라면 집안에 머물러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마리아의 품에 안긴 갓난 아기는 헤로데가 보낸 병사의 칼에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해야만 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것인가 아니면 아기를 지킬 것인가의 기로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의 생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마리아와 요셉의 결단을 통해서 무엇이 하느님의 정의인지 어떻게 구약의 약속이 완성되는지를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 율법의 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묵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25 마태2,13-15.19-23

복된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성가정회원 모두의 건강과

주님의 축복을 가득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특히, 종신서원을 하시는 이 데레사님과

갱신서원,첫서원을 하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비록 예식에 참석은 못하지만

말씀안에서 주님과 함께 그 기쁨 속에서 머물겠습니다.

한 가정의 부모로서, 직장에서 일익을 담당한 구성원으로서,

교회에서 맡은바를 수행하는 사도로서,

정말 존경할 수 밖에 없으신 분들이 바로 성가정회원이라 생각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경제적 어려움과 법적 위태로움을 극복하기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셨으니

그것은 어쩌면 성가정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닐른지...

하지만, 도시의 고층빌딩이, 넓은 대로의 자동차가,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도

성가정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나자렛 성가정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묵상해 본다.

 

 2004/12/27 마태2,13-18

중국의 자금성에는 9900칸의 방이 있다고 한다.

아직도 극히 일부만이 공개된채 배일에 가려있다.

중국 대륙의 황제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많은 방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권모술수에 넘어가지 않고 잘 버텨야 했다고 한다.

 

곧 나노시대가 오면 물질 세계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문인 역사속에서 인류가 겪었던 크고 작은 일들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작업이 병행되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일어날 아주 세밀한 관계의 대화에서 그 일이 발단된 생각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역사세계에 들어가서 극히 작은 요소지만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서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일이 진행되어 인류에 평화를 이끌어낸다는 공상같은 이야기다. 자칫 잘못하면 인간이 하느님의 영역에까지 들어가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범했던 유혹에 또한번 도전하는 셈인 것이다.

 

헤로데의 분통터지는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 원인을 알아내고 발단이 되는 부분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하면 무죄한 어린이가 죽어간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더 큰 오류에 빠져 들어 전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할 때에는 어떻게 하나... (영화 i 로봇 참조)

 

하느님께서 죄많은 인간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일깨워야 함을 느낀다.

 

[ 머무는 평화 ] 20071229

눈이 나린다.

밀가루반죽 부풀러오른 수제빗살처럼

넙적한 눈송이가 가벼이 볼을 스치며

훈훈한 내 마음을 열어 놓는다.

성탄구유 위로 떨어지는 눈 송이는

나귀에 몸을 싣고 잠시 머무르다 떠날

구유의 포근함을 더해준다.

아빠의 손발은 시려워도

엄마의 눈으로 보는 성탄은

포근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