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여인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깨닫게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자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친 엘리사벳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행복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은 믿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요한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무슨 얘기인지 다시 한번 머물러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 인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이 잉태한 뒤 여셧째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마을로 보내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이여 기뻐하여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러나 그때에 마리아는 엘리사벳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엘리사벳의 상황은 어쩌면 남편 즈카르야가 믿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아이를 잉태한다는 말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미 늙은 나이였고 또 아이를 못낳는 여인인 줄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 아니라 아예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벳은 아무리 남자를 알고 또 알아도 잉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리아는 남자를 알기만 하면 언제든지 잉태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흔히 생각하기에는 마리아가 잉태한 것이 더 쉽지 않느냐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이 잉태한 것이 더 큰 기적이고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러한 인간적인 기적같은 기적을 알려주는데에 머물러 있지않습니다.
기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적보다 더 큰 하느님의 신비를 열어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 하느님의 신비는 마리아가 유다 전통 안에서 약혼 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가 차기를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국가들로부터 심한 착취를 겪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가난한 나자렛에 모여 살던 마리아의 집안도 마찬가지로 심한 가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낼 수 없으면 세금 대신 집안 식구중 한명을 바쳐야 할 어려움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나이가 차게되면 노예나 종으로 팔려갈 위험을 안고 살아가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나이가 차자 다윗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을 했고
우선은 사랑해서가 아니라 끌러가지 않기 위해서. .. 하느님께서는 그 약혼한 처녀인 마리아에게 천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천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복음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동정녀 잉태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보다 더 근원적인 탄생을 드러내기 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강생의 신비는 인류 최초의 탄생을 알리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어내시던 그때 최초의 탄생을 이제는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아이 못낳던 여인이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소식을 통해서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했고 그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둘러 길을 떠나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엘리사벳에게 달려갔습니다.
인사를 드리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큰 소리로 외침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기까지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깨달음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엘리사벳의 깨달음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인사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내 주님의 어머니"
이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과 같은 고백입니다.
또한 이 고백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고백이지만
오늘 엘리사벳이 그 늙은 나이에 마리아에게 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자존심으로 가득찬 사람은 기쁨이 없으며 스스로를 고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주위로부터 숫하게 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엘리사벳을 보면 어떻게 늙은이가 저토록 순한 어린양처럼 기뻐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우리의 육신과 얼굴은 늙어갑니다.
하지만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은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소는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습니다. 오히려 늙을 수록 미소는 더 빛을 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 최초의 말씀을 잉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희망이고 기쁨이신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
말씀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
미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마음
희망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20 루카1,39-45
약속된 손님이 올 때에는 늦지만 않으면 괜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손님일 경우는...
식사 시간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환영하며 반갑게 맞이할 수 있다.
손님으로 오시는 분의 식사를 미리 계산하지 않기에
나누어서 누가 되든지 혹은 나만 먹기에 죄송하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후에 로사리오를 드리는데 쌀쌀한 날씨만큼 몸이 움추려졌다.
왠지 더 밝아 보이는 별들을 바라보니 다정스러워 보였다.
기도도 한 낮 보다는 새벽이나 저녁에 더 잘되는걸 보면
대림시기를 보내는 지금 주님을 기다리는 것도 이와 비슷한것 같다.
모두들 깨어있는 한 낮에 기다린다는 것은 어쩌면 삭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조용한 밤은 모두들 잠들었기에
오시는 분을 더 간절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면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도 밤이라고 생각하니
간절한 만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 되어
손을 잡고 얼싸 안으며 그 충만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 된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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