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대림제2주일 루카3,1-6 모든이의 평화(딸// 241207 바딸)

jasunthoma 2015. 12. 11. 03:07

오늘 복음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고 요한의 설교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루카3장에서는 요한의 설교를 다른 복음들에 비해 비교적 자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설교의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이르는 시기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려 볼 수 있겠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통치 제십오년/ 유다지역은 본시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갈랄레아는 헤로데가 영주로/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은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영주로/ 아빌레네 지방은 또 다른 동생 리사니아스가 영주로/ 또 유다 예루살렘에는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에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하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략하게 말하자면 통일 이스라엘이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져서 통치를 하던 시기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헤로데의 세 아들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남쪽으로는 로마총독을 앞세워서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사실은 헤로데 대왕이 죽게되던 기원전 4년경부터 유다의 대사제들은 로마 황제에게 그의 아들들이 유다의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19,14) 를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헤로데의 저 아들들이 유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라며 대사제들은 간청했을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상소가 로마 황제에게 받아들여 지게 되어 결국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로 파견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보기에 헤로데의 아들들은 대사제들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 거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헤로데의 아들들을 북쪽으로 밀어낸 대사제들은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를, 유다인의 왕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왔습니까??? 유다인의 왕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탄생때부터 광야에서 머물던 요한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요한의 선포활동은 갈라진 남북을 한데 모으기 위한 일치 운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세상을 넓게 보고 크게 보라는 의미가 아닐까???합니다. 요한은 평화를 선포하였지만 그의 활동은 세례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제주협력자모임 -> 용두암/ 불국사

2때에 제주도 수학여행 -> 용두암/ 불국사

용두암과 불국사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동안 나는 보다 넓은 길을 보았고, 보다 높은 산을 보았으며, 보다 깊은 골짜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요한이 선포했던 하느님의 말씀은 더이상 같은 동족끼리 비방하거나 헐뜯지 말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곧 평화를 선포하러 사람의 아들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가 한 일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일에 머물렀습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세상은 좁아 보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백성들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자비롭고 관대해지기를 바라며 세례를 베푼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재물이나 사물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지성과 마음과 활동이 더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 이해할 수 없는 형제들의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길이 곧은 길로 바뀌고, 저 치솟는 불신의 노여움이 평화속에서 잠잠해질 수있도록 더욱 너그러워지고 관대해지라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정화활동을 통해서입니다.

어렸을적 보았던, 눈이 보았던 생각에 고착되어 있지말고 우리의 관대해지지 못한 마음이 허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때 그토록 철옹성같았던 이념들이 세상에서 최고인 것 같았으나 이제와보니 하느님의 평화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아집에 불과했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평화로 이끌어주시기 위해 강생하신 그 분이 곧 오신다는 것이 요한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대놓고 나무라거나 강압적이고 포악하게 선포해서는 안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활동을 보면 무능한 지도자나 대사제 면전에다가 포고하듯 직접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소에는 광야에서 살았지만 때가 차자 요르단 부근의 지방에 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갈릴레아 도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랬다면 평화는 폭력으로 바뀌었을 지도 모를 것입니다. 오히려 반발력만 더 커졌을 지도 모를 것입니다.

지도자들 면전에서 가르치듯이 복음 선포하는 일은 사람의 아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움직이실 때에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움직이기 전까지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깨어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평화의 임금님이신 아기 예수님은 이미 강생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벌써 오셔서 이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차분히 당신이 나서실 때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평화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