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는 대목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취되신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었길래 예수님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하시며 성령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기까지 하셨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앞뒤 문맥을 짚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 직접적인 이유는 앞장부터 이어지는 제자들의 파견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뒷장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기도까지입니다.
먼저 파견된 일흔 두 제자가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를 하는데 그들은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 다음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무엇을 이야기 하기 위함일까요???
우선은 아버지의 이름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거룩히 빛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복종하게 된 것을 두고 기뻐하는 제자들의 상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이 돌아와 활동 보고하는 모습을 보시고 당신도 덩달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이름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에서 제자들의 이름으로 그 영광이 옮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기뻐하는 제자들의 기쁨에 공감하시는 장면입니다.
돈안들이고 상급을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들어가서 안되는 일이 있겠냐??며 모든 일에는 돈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돈 안들어가서 일이 잘 안풀리는 경우보다 돈들어가서 일을 망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럴 것입니다.
실컷 가진 재산을 열심히 갔다 바쳤는데 기쁨이 오기는 커녕 고독함과 외로움 씁쓸함 비굴함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하느님께서 하늘나라의 상급을 주실 때에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다른 매개체로 인해서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내 존재가 직접적인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제자들은 오늘 그러한 기쁨을 서로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했을 때에 일어난 체험들을 이야기하며 서로서로 공감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과 기쁨을 함께 하시며 그 기쁨을 제자들의 공로로 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공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슬플때에는 슬픔에 슬픔을 더해 노여워하시고
기쁠 때에는 기쁨에 기쁨을 더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때마다 성령은 예수님을 감싸 안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몸소 보여주시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달 8일 (원죄없이잉태되신동정마리아대축일) 부터 내년 11월 20일 (그리스도왕대축일) 까지 자비의 희년이 선포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는 계기는 세상에 어둠이 너무 짙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셨고 그 어둠이 더 짙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어두움 그것도 어둠지 않아 밤도 낮과같이 환히 들여다 보시기는 하지만 우리 인간의 세상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특별 희년 기간 동안만이라도 문을 활짝 열고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하고 고통받는이의 고통을 덜어주며 아픈 사람과 함께 공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취지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정의로우시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저버리고 지키지 않는다면 삼대까지 벌하겠지만 내 계명을 지키고 따르기만 한다면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책벌하실때에는 정의로우시지만 축복하실 때에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고통과 시련의 끝은 보여주시지만 기쁨과 축복의 끝은 볼 수 없을 만큼 주겠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아무리 길어야 삼대라는 것입니다.
즉 끝없는 고통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끝자락에 희망을 걸어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통과 시련은 희망의 시작이고 희망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공감은 연민을 자아내고 연민은 자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비는 연민(동정심)의 끝자락에 닿아있습니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활동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연민(compassion 컴패션)은 요즘 구호활동, 보호활동, 보존활동, 연대활동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탄길" 저자의 또다른 이야기인 "판다야 미안해"라는 책이 있습니다 ~~~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공감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복자 알베리오네 사제는 세상과 공감하는 방법으로 기도하고 일하라는 오라 엣 라보라 Ora Et Labora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대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복자 알베리오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기도만 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단 무릅을 굻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무릅꿇고 드리는 기도는 기도만이 아니라 기도안에 일을 옮겨 놓은 일이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가 일이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가족은 가난하고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력하고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우심으로 우리의 기도와 일의 결실을 배가시켜 주시기를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되 단순한 노동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되 단순히 기도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셨습니다.
같은 시간에 몇 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바오로적 열정(passion)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전거 패달을 한바뀌 돌리더라도 얼마만큼 큰 열정으로 돌리는지에 띠라서 패달 한바뀌를 돌려서 1미터를 가기도 하도 10미터를 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을 나만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를 위하여 사용할때에 열정(패션)은 연민(컴패션)이 되고 연민은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misericordia)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하느님이라도 가만히 있는 사람의 자유를 침범해서까지 억지로 연민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를 하되 저항하는 기도를 드리고 일을 하되 열정적으로 일을 할 때에 기도만으로도 일을 한 효과를 내게되고 일만으로도 기도를 한 효과를 내게 되어
하늘이 공감할 때에 하느님의 자비는 충만히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또다시 희망을 기다리며 깨어 기도해야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록 우리는 무능하고 모자라고 가난한 철부지 아이와 같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볼 수 있는 대림시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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