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타나엘에게 거짓없는 사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선포하셨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성경에서 나타나엘은 카나출신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카나라는 지명은 요한복음에서만 두차례 언급되는데 첫번째는 카나혼인잔치로 잘 알고있는 마을로 소개됩니다.
이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고 말씀하셨던 그 마을입니다.
그러니까 잔치는 있는데 포도주가 없는 마을로 소개되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요한복음 끝부분 21장 2절에의하면 카나라는 지방은 나타나엘의 고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타나엘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첫 제자 네명을 부르신 후 곧이어서 필립보와 함께 부르는 장면과 함께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를 부르시자 필립보는 나타나엘을 만나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나타나엘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나자렛을 무시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나타나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반에 걸쳐서 나자렛이라면 무시해도 괜찮다는 분위기가 깔려있었던 것인지. . .
아니면 나타나엘 또한 포도주도 없는 마을 출신이었기에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인지. . . 알수는 없지만
카나 또한 나자렛만큼이나 뭐 대단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시골이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나자렛이나 카나나 비슷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카나가 오히려 나자렛보다 더 시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사돈 남말하고 있네' 뭐 묻은 개가 재묻은 개 나무라고 있네라며 맞받아 쳤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엘의 편견에 예수님께서는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나타나엘은 약간 당황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자신은 예수님의 출신 지역에 빗대어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무시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숨김없이 말하는 나타나엘을 오히려 거짓이 없는 사람으로, 속임수가 없는 사람으로 인정하시며 칭찬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선조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아니 내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하며 아브라함은 엎드려 주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몸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이나 당신의 귀여움을 받으며 잘 살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즉 현실 가능한 일이나 일어나게 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진실 된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의 진실된 기도를 듣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고 한 마음인 것처럼 기도를 올리는 사람을 올곧게 보실 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숨김이 없는 기도, 거짓이 없는 기도, 속임수가 없는 기도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도 오히려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진 그 자리에서 우리의 잘못된 생각조차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움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의 잘못된 편견은 예수님께는 통하는데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중1학년때 음악시간 ~~~ 꼴에 ~~~
따라서 그러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조차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 . 여기계신 분들은 모두가 받아들이겠지만 . . 그럼에도 안 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만약에 보인다면 그 사람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그리스도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조차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우심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시련이 왔을 때 두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그러한 소양을 지닌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둠속으로 들어가더라도 빛이신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훤히 다 드러나버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숨김없는 기도를 거침없는 기도, 우리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는데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괜찮다 할지라도 우리 형제들은 힘들어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보시지만 우리의 헝제들은 예수님만큼은 자비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 보는 사람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자기를 무시해도 기뻐합니다.
먼저는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아들 즉 사람의 아들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천사처럼 진실한 기도, 참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시간안에 머물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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