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27주간 월요일 루카10,25-37 영원한 행복(수원협력)

jasunthoma 2015. 10. 10. 05:5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누가 나의 진정한 이웃인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십니까???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라는 주인공은 이웃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데 자기 자신조차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으로 인정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아 존재를 자기 자신조차 이방인 이라는 명제 속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대 자연 안에 초라한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이방인, 사회에 대한 이방인, 가족에 대한 이방인, 애인에 대한 이방인, 친구에 대한 이방인, 부부에 대한 이방인, 그리고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은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자 하는 화두입니다.

 

유희하는 이방인의 영혼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도식이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혼의 유희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상념속에서 영혼의 숨결을 느끼며 그 영혼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맡기는 유희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의 다양한 인생관들 중에서 좀 더 특이할 만한 것은 뫼르소의 결혼관이다. 그는 결혼이란건 중대한 일이 아님을 확신하며 살았던 것 같다. 흔히 결혼을 인륜지대사라 하여 전통적으로 매우 중히 여겨왔다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정식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뫼르소에게는 그다지 볼품없는 겉치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결혼이란 것도 한 순간 머물다 사라지는 뜬구름임을 호소하려는 것이 뫼르소의 의도가 아닐까? 긴장과 흥분으로 요동치며 쾌락으로 세월을 보내고 싶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울일뿐 실체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생 여정의 밀물이 몰려들어 감정의 숲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처사가 아닌가? 늪에 빠진 몸이 자꾸만 깊숙이 들어가듯이 이성의 마비로인해 발생하는 지속적인 오류로 보여진다. 즉 쾌락으로 가장한 기쁨, 행복이 결혼으로 주어지는 미화가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인간의 감정과 쾌락도 하느님이 주관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보다 더 고귀한 무엇인가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빼먹을 수없는 가치를 안고 있으며 그것을 생각해보고 그대로 실천해 보지 않고는 결코 그것만의 고귀함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누구나 그 선상에 머무를 수 없는 아쉬움이 존재한다. 적적한 때를 알고 그 시기에 맞춰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본다면 뫼르소는 인간의 생체리듬의 때를 거슬러 살지는 않았지만 그 적절한 때를 맞춰 사회제도화하여 이를 어기거나 소홀히 하지 못하게 하는 올무를 뒤집어쓰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개별 감정에 순종했으며 그 감정은 분명 절제된 이성의 선택으로 조절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성을 통해서 감정을 받아들임이 자칫하면 무분별한 사람이나 책임회피자 혹은 현실도피자쯤으로 인식될 수 있겠으나 이는 명확히 하자면 잘못된 추론이다. 뫼르소가 결혼을 애써하려하지 않는 것은 결혼 제도에 대한 거부가 아니다. 그는 단지 결혼의 불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뫼르소의 입장은 정제된 종교 규율에 닫혀진 혼인의 불가해소성 이전의 자유로움에 그 근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거이다. 오히려 인류의 근원인 아담과 하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더 진실된 진술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아무도 아담과 하와가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보다 오히려 주님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느끼는 사랑이 더 크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최상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생각하며 그분과 일치됨이 절대적 행복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백골이 진퇴되도록 사무치는 육신의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과 인간이 한 방향으로 일치를 이루며 유희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유희하는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을 누구에게서 발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는 장면(루카10,21-24) ->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기뻐)하며 말씀하였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세사람 중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였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누구였을까요???

동족을 보고 피해 달아난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을 보고 여관(교회->야전교회)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던 이방인 이였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사마리아인의 처지는 실재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초죽음이 된 사람을 돌보느라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여비를 다 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돌아오는 길에 벌어다가 모자란 부분을 갚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이 이방인을 만나 빚쟁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빚을 지고 그는 행복했을까요????

이 비유는 누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사셨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뺄셈의 삶, 빼앗기는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합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혹시 셈을 하실 때에 뺄셈을 잘하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덧셈을 잘하는 편입니까???

혹시 나는 덧셈보다 뺄셈을 잘하는 편이다 하시는 분???

아니면 나는 뺄셈보다 덧셈을 잘하는 편이다 하시는 분???

예) 햄버거 4,500이면 5,000원짜리 지폐를 주고 5,000 - 4,500 = 500원을 그슬러 받는 경우인지. . .

햄버거 4,500원 이면 천원짜리 지폐 4장에다가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더해 지불하는 경우인지. . .

 

토끼와 거북 이야기 -> 어느날 토끼가 콜라를 사러갔다. 가게에 가서 "거북 아저씨 콜라 7개만 주세요" 그러자 거북 아저씨가 콜라를 내 주었다. 콜라 하나에 700원... 흠... 그러면 얼마?? 아 4,900원 이닷. 아저씨가 콜라 7개를 토끼에게 주자 토끼가 "아저씨 바다욧" 하면서 100원짜리 동전 49개를 바닦에 던져벼렸다. 황당한 아저씨... 토끼는 도망가고... 거북 아저씨 100원짜리를 줏어보니 49개가 맞았다. 이에 거북 아저씨 열받았다!! 다음날 다시 나타난 토끼... 역시 콜라 7개를 샀다. 아저씨 다시 몰라 7개를 준다. 그러자 토끼왈 "아저씨 바다욧!!!" 이러믄서  다시 100원짜리 동전 49개를 바닦에 부렸따!!! 도망가면서... 넘 불쌍한 거북 아저씨... 동전을 세어보니 또 49개가 맞았다... 이제 거북 아저씨 열나 열받았다!!! 또 다음날 토끼가 다시 콜라를 사러왔다... 음... 7개??? 아저씨가 갖다주려구하자... 헉... 토끼가 이번에는 동전이 아니라 만원짜리 지폐를 꺼내는 것이었다... 갑자기 토끼를 쳐다보며 웃음을 머금는 거북아저씨... 후훗??? 그 웃음의 의미는??? 토끼가 거스름돈을 달라구 하자... 우리의 거북 아저씨 왈... "이노무 퇘깐아 바다다랏!!!" 하시면서 100원짜리 동전 쉰한개(51개)를 바닦에 뿌렸다... (10,000원 - 4,900 = 5,1000원) 계산 끝... 아저씨 속이 후련했다... 그걸 보더니 토끼가 100원짜리 동전 2개를 주우면서 어저씨 콜라 7개 더주세요!!!

 

사실 우리 인간의 삶 자체가 뺄셈의 삶이나 다름 없습니다.

정해지고 주어진 날수를 차감해 나가는 삶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미사부터 봉헌한다는 것은 오늘 하루 우리 각자로 말미암아 뿌려질 은총을 미리 받는 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월급이 아니라 선급을 받는것입니다.

먼저 받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받은 은총을 쓰든지 안쓰든지 상관없이 다음날 같은 은총을 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뺄셈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에서 사도바오로는 덧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에 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더하기의 삶은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 우상숭배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에는 하느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빼기의 삶은 우리의 가족마저도 버리도록 권고합니다.

극단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빠지지 않을까봐 염려해야지 빠져 나갈까봐 걱정해서는 행복에 이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흘러 넘치지 않을까봐 염려해야지... 몸을 숙이고 담을 낮추어 흘러넘치게 되지

넘쳐 흐를까봐 걱정해서는 계속해서 담을 높이기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쌓고 또 쌓는 더하기의 삶은 결국 재앙의 불씨가 될 뿐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누가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잘 살펴보고 만약 착한 사마리아인이 행복한 사람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그렇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행복한 삶에로 초대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