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마르타 입장에서는 상당히 속상한 말씀이었을 것 입니다.
기껏 시중들어 줬더니 돌아오는 것은 속을 박박 긁는 야속한 말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는 칭찬을 받고 마르타는 야단을 맞았을까요???
오늘 복음 장면을 다시 읽어보면 마리아가 왜 칭찬을 받고 마르타는 왜 야단을 맞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더하기의 삶을 사는 모습이었고 마리아는 빼기의 삶을 사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게 서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차분하게 앉아있었습니다.
즉 서있는 마르타와 앉아있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에 마르타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더 하고자 하는 모습이고 마리아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내려놓는 모습입니다.
즉 덧셈의 삶과 뺄셈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더하기의 삶보다는 빼기의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동생 마리아의 예를 들어 알려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더하기의 삶보다는 빼기의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먼저 마르타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들였는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집도 자기 집이고 손님을 모신 이도 자기였는데 정작 손님 곁을 지키고 있던 이는 동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집밖에서는 환대를 했지만 집안으로 모셔들이자 외면한 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집 밖에서는 어려운 손님이었는데 집 안에 모셔들이자 편한 집안 식구처럼 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마리아였다는 얘기나 다름 없습니다.
여기서 "이웃이 되어준다"라는 말은 Prossimita -->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마르타는 말을 많이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소통이 안되는데 마리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소통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웃이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가 나의 진정한 이웃인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십니까???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뫼르소라는 주인공은 이웃과 이방인의 경계를 허무는데 자기 자신조차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으로 인정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자아 존재를 자기 자신조차 이방인 이라는 명제 속에서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대 자연 안에 초라한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이방인, 사회에 대한 이방인, 가족에 대한 이방인, 애인에 대한 이방인, 친구에 대한 이방인, 부부에 대한 이방인, 그리고 자기 육신의 영혼에 대한 이방인은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자 하는 화두입니다.
유희하는 이방인의 영혼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도식이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혼의 유희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하루하루 주어진 삶을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상념속에서 영혼의 숨결을 느끼며 그 영혼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맡기는 유희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유희하는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유희하는 영혼의 전형적인 모습을 누구에게서 발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는 장면(루카10,21-24) ->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기뻐)하며 말씀하였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웃이 되어준다는 것은 뺄셈의 삶, 빼앗기는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소통을 하면 무엇이든 빼앗기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러분들은 혹시 셈을 하실 때에 뺄셈을 잘하시는 편입니까?? 아니면 덧셈을 잘하는 편입니까???
혹시 나는 덧셈보다 뺄셈을 잘하는 편이다 하시는 분???
아니면 나는 뺄셈보다 덧셈을 잘하는 편이다 하시는 분???
예) 과일 한봉지가 4,500이면 5,000원짜리 지폐를 주고 5,000 - 4,500 = 500원을 그슬러 받는 경우인지. . .
햄버거 4,500원 이면 천원짜리 지폐 4장에다가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더해 지불하는 경우인지. . .
토끼와 거북 이야기 -> 어느날 토끼가 콜라를 사러갔다. 가게에 가서 "거북 아저씨 콜라 7개만 주세요" 그러자 거북 아저씨가 콜라를 내 주었다. 콜라 하나에 700원... 흠... 그러면 얼마?? 아 4,900원 이닷. 아저씨가 콜라 7개를 토끼에게 주자 토끼가 "아저씨 바다욧" 하면서 100원짜리 동전 49개를 바닦에 던져벼렸다. 황당한 아저씨... 토끼는 도망가고... 거북 아저씨 100원짜리를 줏어보니 49개가 맞았다. 이에 거북 아저씨 열받았다!! 다음날 다시 나타난 토끼... 역시 콜라 7개를 샀다. 아저씨 다시 몰라 7개를 준다. 그러자 토끼왈 "아저씨 바다욧!!!" 이러믄서 다시 100원짜리 동전 49개를 바닦에 부렸따!!! 도망가면서... 넘 불쌍한 거북 아저씨... 동전을 세어보니 또 49개가 맞았다... 이제 거북 아저씨 열나 열받았다!!! 또 다음날 토끼가 다시 콜라를 사러왔다... 음... 7개??? 아저씨가 갖다주려구하자... 헉... 토끼가 이번에는 동전이 아니라 만원짜리 지폐를 꺼내는 것이었다... 갑자기 토끼를 쳐다보며 웃음을 머금는 거북아저씨... 후훗??? 그 웃음의 의미는??? 토끼가 거스름돈을 달라구 하자... 우리의 거북 아저씨 왈... "이노무 퇘깐아 바다다랏!!!" 하시면서 100원짜리 동전 쉰한개(51개)를 바닦에 뿌렸다... (10,000원 - 4,900 = 5,1000원) 계산 끝... 아저씨 속이 후련했다... 그걸 보더니 토끼가 100원짜리 동전 2개를 주우면서 어저씨 콜라 7개 더주세요!!!
사실 우리 인간의 삶 자체가 뺄셈의 삶이나 다름 없습니다.
정해지고 주어진 날수를 차감해 나가는 삶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미사부터 봉헌한다거나 한 주간의 시작을 미사로 시작한다는 것은 오늘 하루 그리고 이 한 주간 우리 각자로 말미암아 뿌려질 은총을 미리 받는 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을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월급이 아니라 선급을 받는것입니다.
먼저 받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받은 은총을 쓰든지 안쓰든지 상관없이 다음날 같은 은총을 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뺄셈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빼기의 삶은 우리의 가족마저도 버리도록 권고합니다.
극단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마저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빠지지 않을까봐 염려해야지 빠져 나갈까봐 걱정해서는 행복에 이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흘러 넘치지 않을까봐 염려해야지... 몸을 숙이고 담을 낮추어 흘러넘치게 되지
넘쳐 흐를까봐 걱정해서는 계속해서 담을 높이기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쌓고 또 쌓는 더하기의 삶은 결국 재앙의 불씨가 될 뿐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누가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잘 살펴보고 만약에 마리아가 행복한 사람이라면 우리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도록 하고 또한 그렇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행복한 삶에로 초대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 복음에 나오는데 야곱의 우물가 이야기입니다.
거기에서 정말 목마른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 자신이면서도 목마르지 않은 척하며 오히려 자기가 예수님께 물을 줄 수 있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전형적인 마르타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복입니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해 연중제27주간 토요일 루카11,27-28 참행복(성바) (0) | 2015.10.15 |
---|---|
나해 연중제27주간 금요일 루카11,15-26 영혼의 도킹(제주협력자// 20240307 행운동성당) (0) | 2015.10.10 |
나해 연중제27주간 월요일 루카10,25-37 영원한 행복(수원협력) (0) | 2015.10.10 |
나해 연중제27주일 마르10,2-16 (성바// 마태19,3-12 서동성당// 241006 성바; 선부동성당// 250228 행운동성당) (0) | 2015.10.05 |
나해 연중제26주간 화요일 성미카엘가브리엘라파엘대천사 요한1,47-51 참기도(스승) (0) | 2015.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