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성심 대축일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예수성심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으며, 예수님의 마음에 어떻게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의 성심은 4복음서를 통해서 다양하게 느낄 수 있지만 특히 오늘 복음을 통해서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고 증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군사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곳에서 곧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고 예수님의 심장을 찔렀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분명히 유다인들의 요구는 다리를 부러뜨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린 후 시신을 치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왜 빌라도는 군사들을 시켜 유다인들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이 숨지신 것을 보고도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심장을 터트렸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왜 심장을 터트려서 피와 물을 쏟아지게 했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고 있듯이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그리고 다음날은 안식일로서 그들의 파스카를 경축하는 날이었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되도록 선동하는데 준비일 전날부터 온 정신을 다 쏟아 시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하는데 이틀을 써버렸던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준비일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하니 이제 곧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면 그들은 파스카 축제의 세칙에 따라 의식을 거행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식을 준비해야할 시간에 예수님을 처형하느라 시간을 다 써버렸고 결국 시간이 촉박해진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파스카 준비일을 어떻게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그들은 모를리가 없었습니다.
탈출기12장 부터 13장 이하에 보면 파스카 준비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관하여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는 가서 저마다 제 집안을 위하여 작은 짐승을 한마리씩 끌어다 파스카 제물로 잡아라. 그날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외국인은 아무도 파스카 제물을 함께 먹지 못한다. . . 어느 집이든 한 집에서 먹어야한다. 고기를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면 안된다. 뼈를 꺾어버리거나 부러뜨려서도 안된다. 그것을 먹을 때에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그리고 우슬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대야에 받아 놓은 피에 담가라. 그것으로 그 대야에 받아놓은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그리고 너희는 아침까지 아무도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러 나가시다가,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보시면, 그 문은 거르고 지나가시고 파괴자가 너희 집을 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위한 규정으로 삼아 영원히 지켜야 한다."
빌라도 또한 이러한 유다인들의 전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어린양 대신에 유다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예수님의 피를 쏟아 유다인들에게 뿌림으로써 그들의 파스카 축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며 조롱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그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 명패를 붙일때에도 유다인들을 조롱하고 모욕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자칭해서 말했다고 써야한다고 항변했을 때에도 빌라도는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다" 하며 유다인들의 주장을 조롱하듯이 무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보고계시는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빌라도 사이에서 천대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이사야 예언자는 네차례에 걸쳐 노래하였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았습니다."(이사42,2) 주님의 종의 첫째노래
"나는 쓸대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49,4) 둘째노래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50,6) 셋째노래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이사53,4) 넷째노래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사도바오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성심에서 풍요로운 은총과 위로를 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성심이야말로 사랑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다면 예수성심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같은 예수성심의 모습을 복음에서는 다양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속 이야기들 중에서 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는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예수님을 붙들었다)
부활하신 뒤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셨던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그들이 그물을 끌어올려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잡은 물고기를 몇마리 가져 오너라")
어제 복음인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는 무엇보다도 단연 아버지와 아들로 구성된 돌아온 탕자 혹은 잃었던 아들이라는 루카복음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닐 기유메트의 "땅끝까지"라는 책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재력가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 밑에서 온갖 혜택은 다 누리면서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골칫거리 외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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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그리고 예수성심 성월을 지내는 동안 우리 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자비로우신 예수님 모습// 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발견하여 "나의 마음이 님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시간으로 봉헌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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