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나해 연중제6주일 마르1,40-45 성실한 영혼(성마리아재속회-까떼)

jasunthoma 2015. 2. 15. 19:56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곡히 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조금 이상한 행동과 말씀을 하십니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분명히 나병환자가 해주기를 바랐는데 당신이 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네 소원대로 해 주겠다 또는 네가 원하니까 내가 해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원했기 때문에 내가 해주겠다는 식의 소극적인 태도가 분명 아닙니다.

병을 나수어 주기 이전에 먼저 책임이 전가되고 있습니다.

나는 별로 마음 내키지 않은데 네가 하도 해달라고 청하니까 마지못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나병환자가 원해서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스스로 하고자 하셔서 그 병을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정한 사람은 공동체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는 율법 조항을 예수님 당신이 모두 감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성실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성실히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바치는 그 기도 자체가 성실할 때 성실한 기도가 됩니다.

그래야만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기도가 멈추거나 끊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나를 지배하고 이끄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내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마음 기뻐 뛰노나니~~)

 

- 수도원일기 -

배추벌레- 03/06/19

한 농부가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자 밭을 일구고 밑거름도 잘 해서 기름진 곳에 배추 씨앗을 뿌렸다.

한 곳은 양지 바른 곳이고 다른 한 곳은 포도나무 아래였다.

바람이 불고 봄비가 내리자 곧 싹이 돋았다.

벌레가 생겨 잎사귀에 붙었는데, 한 마리는 햇빛이 쪼이는 곳으로 갔고 다른 한 마리는 시원한 그늘을 찾아서 포도나무 아래로 갔다.

배추가 자라자 포도나무 덩굴에서 잎이 나와 그 아래는 그늘이 되었다.

한 마리의 벌레는 뜨거운 태양아래 배추잎을 갉아먹고,

다른 한 마리의 벌레는 시원한 포도덩굴 아래에서 배추잎을 갉아먹었다.

각각 열심히 갉아 먹었다.

양지 바른 곳의 배추는 벌레가 갉아먹어도 무럭무럭 자라서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도록 먹을 것이 풍부했다.

그런데 포도나무 아래의 배추는 녹아버렸고 그 배추벌레는 굶어 죽었다.

 

질병이 생명을 앗아 갈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느님이 거두어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생명은 하느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오늘도 생명을 부르기보다 질병을 더 자주 불러들여 질병을 섬기려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몸은 생명을 부르면 건강해지고 질병을 부르면 건강한 사람도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는 질병을 다스리는 의사가 아니라 생명을 다스리는 의사입니다.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도록 활력을 주는 의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사람을 통해서 생명을 느끼고 활력을 얻울 수 있다면 그를 생명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의사와도 같이 보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의사들은 병을 다스린다며 계속해서 병을 쥐어짜다보니 오히려 병자의 병이 내성이 생겨버려 병이 더욱 깊어져 버립니다.

질병을 잡는다고 하면서 사람잡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있습니다.

생명보다 질병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살을 헤치며 물에 맞서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고 건강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갖은 질병들이 천성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저항을 회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 저항을 꺼려하거나 회피하고나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나 시련과 고통에 잘 맞서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명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은 율법 속의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율법에 저항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율법 아래에서는 부정한 사람을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손을 잡아 주심으로써 격리된 그 율법에 저항하게 되었고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여 당신의 생명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저항하지 않는다면 율법의 완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육신의 나병이 있듯이 우리 영혼에도 나병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의 나병은 무엇일까요? 어떤 병일까요?

영혼의 나병이 걸린다는 말은 우리의 정신이 썩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정신이 썩으면 우리 영혼도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몸의 지체들이 나병으로 인해 없어지고 사라지듯이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열정이 시들고 식어버릴 때 우리의 영혼은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가만히보면 영혼의 나병이 걸린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게으르다는 점입니다.

특히 알면서 하지 않는 게으름입니다.

알면서 안 하든지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합니다.

실수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실수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실수는 우리 영혼의 나병을 고쳐 줄 수 있는 소중한 열정의 열매이자 결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나병환자는 안된다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격리되어 있어야 할 몸으로 저항한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율법을 아는한 그 자체로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실수는 우리를 저항하게 합니다.

저항이 실수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우리를 저항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병이 들었다면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실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실수는 우리를 저항하게 하고 저항은 우리를 깨어나게하고 생명을 부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관해 잠깐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인에 한해서 선민사상과 육화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민사상은 개별구원을 배재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지 시메온이라는 한 사람 개별개체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메온의 노래에서처럼 이스라엘이 구원된다면 자기 자신은 이제 눈을 감아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육화사상입니다.

육화사상은 전체구원을 배재합니다.

꼭 가려내서 모두가 다 구원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된 민족의 구원도 한발짝 뒤로 물러서게 합니다.

개별 개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자신이 기억된다는 것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구원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대로 정결을 지키는 무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무리가 단체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육화사상에 의해 이미 개별구원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다는 것입니다.

육화로 인한 개별구원에서 시작하기에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그대로 이혼하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애써서 결혼하려하지말고 그 자체로 완전한 사람이니 그대로 살아가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교도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개체는 완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인 그리스도 예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개별 생명은 영원불멸합니다.

하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든 이교도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시시하게 비춰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에 잔치상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좀 더 우리 안에 잘 형성될 수 있도록 성실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