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평소에 어떻게 불러집니까?
이름으로 불리던지 본명이나 수도명으로 불리던지 아니면 별명으로 불리든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불려야 할까요?
어느날 사도직이 끝나고 성당에 앉아있는데 누군가 저를 불렀습니다.
딱 한번 불렀는데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어머니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늘 부르시던 그 목소리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저의 이름을 부렀을까요? 제 본명을 불렀을까요?
사실 혼자 있을 때에는 이름으로 불리든지 본명으로 불리든지 별명으로 불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히 살아있다면 어떻게 불리든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심지어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듣는 사람이 돌아보고 예라고 응답만 한다면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 됩니다.
한 번은 도서선교를 갔는데 본당에 조금 일찍 도착해서 그런지 조용했습니다.
마침 성당 마당에 혼자 지나가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사님이 처음 본 그 아이에게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예"하고 돌아서서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을때에 그 아이에게 방금 부른 그 본명이 네 본명이 맞냐하고 물어봤습니다.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네 본명도 아닌데 왜 대답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어른이 부르면 대답해야 한다고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첫번째 삶은 고난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전생이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과거의 자기 조상들의 삶이 현재와 미래의 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제 아무리 내 아버지라도 그로부터 어떤 혜택도 없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외롭고 고독한 삶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어떤 시련이 다가 오더라도 그 일은 어제의 일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오늘의 새로운 일로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아버지의 권한을 물려받아서 내가 특혜를 보는 삶이 아니라 오늘 이라는 일생 일대의 단 한 번뿐인 새로운 시간을 철저히 자기 자신의 삶으로 선포해야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당신의 케리그마는 강생에서 십자가 그리고 부활 순으로 선포(케리그마)되었지만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케리그마는 시대의 역순으로 선포됩니다.
먼저 부활체험에서 시작해서 십자가 그리고 강생신앙에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형성될때에 가능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것은 동방 박사처럼 별을 보고 갖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리아야"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를 불렀을 때였습니다.
나는 아직 죽지도 부활하지도 않았지만 "마리아야"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내 안에서 울려퍼졌을 때
그때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부활신앙이 형성 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사람의 일만 생각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아직 "베드로야"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어떤 부르심에도 "예"라고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해 연중제6주간 토요일 마태16,13-19 봉사라는 열쇠(딸/ 240808 스승) (0) | 2014.02.22 |
---|---|
가해 연중제6주간 금요일 마르8,34-9,1 유종의 미(딸) (0) | 2014.02.21 |
가해 연중제6주간 월요일 마르8,11-13 하늘의 표징(성바) (0) | 2014.02.17 |
가해 연중제6주일 마태5,17-37 작은계명(성바) (0) | 2014.02.16 |
가해 연중제5주간 화요일 마르7,1-13 (스승// 250211 행운동성당) (0) | 2014.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