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가해 대림제2주간 금요일 성녀루치아동정순교자 마태11,16-19 주님께 신념(스승)

jasunthoma 2013. 12. 13. 04:02

언제부터인지 해마다 성탄이 가까워지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큰 사찰에서 스님이 산타 모자를 쓰고 성탄 트리를 장식하면서 아기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초파일이 가까워지면 마찬가지로 큰 성당에서 한국천주교를 대표하는 주교님이 미사 강론중에 부처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수원 신학교 다닐때에 종교학 시간에 종교간 대화라는 과제물이 있었는데 저는 불교를 택했습니다.

그때에 용주사를 찾아가서 사무국장 스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에 용주사에는 템플스테이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왔다고 하니까 용주사와 수원가톨릭대학교의 상호 교류차원에서 사찰과 신학교 인근에 서로의 상징물을 달자고 스님이 제안했습니다.

안된다고 그랬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세대의 사려깊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이 세대는 자기 주장이 강한 아이들이 장터에서 편을 갈라 앉아 서로 자기가 옳다고 소리지르며 노는 모습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세대가 왜 그토록 서로 다른 입장에서 다른 소리를 내며 서로 자기가 옳다고 말할까요?

그때 당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던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아서 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안식일인데 먹지도 않는다고 요한을 마귀취급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이든지 먹고 무슨날이든지 마시니까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을 존중하셨습니다.

지킬 것은 지키셨습니다.

다만 이방인과 있을 때에는 이방인이 지키는 예식으로

유다인과 있을 때에는 유다인이 지키는 규정을 존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신 모습을 베드로로와 바오로를 통해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바오로에게 딱 걸렸습니다.

바오로는 아예 자기는 이방인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왜 그토록 안식일에 메이지 않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니까 안식일 규정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날이 주간 첫날이었다고 모든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날이 되는 겁니다.

궂이 유다교 날짜로 따진다면 주간첫날이니까 월요일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주간 첫날을 주일로 지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날에 부활하시고 성령이 그날에 강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단식하며 울고 애통해 하더라도 제자들은 신랑이 있는 동안에는 먹고 마시는 신념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팔을 세번 불어서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더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마냥 쉴수많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세대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누가 서로 옳고 누가 서로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전에 종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신념도 없이 피리를 불면 덩달아 춤추고 곡을 하면 마지못해 가슴을 쳐서는 철없는 아이들에 지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기다릴줄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념이 없으면 바라봄도 기다림도 없습니다.

흔들리는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니까 항상 흔들리고 항상 그을음이 납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성녀 루치아 또한 그렇게 주님을 바라고 증거하고 기다리며 순교의 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먹고자고 입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요한이나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동정 성녀 루치아는 이세대에게 그리스도의 등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믿음의 불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요히 머물러서 공동체를 장터로 만들지 않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4/12/09 마태11,16-19

인간은 누구나 부와 권력을 쥐고 싶어하고

길지 않은 인생여정에서 많은 일을 하고싶어 한다.

물론 권력가들이 좋은 일도 많이 하지만

대개는 그 욕심을 팽창시키고 싶어서 벌리는 일들이

가난한 서민들에게 혹독한 한파로 다가오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날마다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으로

병든 환자가 치유되고 다가가기 꺼려하는 죄인들이 회개하여

주님과 가까워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완고한 자들은 자기밖에 모르고,

모든 일에 간섭하며 주님께 외도한다. 

그들이 감놔라 배놔라하는 동안 

하늘나라는 점점 멀어지고

어느듯 자신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것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