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연중제22주간 화요일 루카4,31-37 말씀의 영과 육

jasunthoma 2013. 9. 3. 05:4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하는 데 그 권위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그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예수님의 권위는 말씀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품위에서 나왔을까요?

예수님의 권위는 어느쪽이 더 가까울까요?

우선은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에는 외모가 없고 힘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베드로를 떠올려보면 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은 언변이 보잘 것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언변 좋은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어 부르기 좋아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언변과 사변에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닮고자 노력했던 가장 훌륭한 인물은 바로 사도 바오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품위를 닮고자 노력했던 인물이 될 것입니다.

비록 언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예수님을 닮은 품위는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세례의 영애를 안겨다 주기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 권위있는 말씀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본문 23절 이하에 그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영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을 가르쳤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을 가르치십니다.

즉 영을 다스리십니다.

거룩한 영이든 더러운 영이든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언제나 영이십니다.

 

올해 들어 제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고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고작 80년이라 했는데

저는 키는 작지만 근력이 딸리지는 않은 편이니까 이제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얼굴이 받쳐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살아갈 수록 사람은 영혼의 도구일 뿐이라는 영적인 매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놀라게 되는 것은 겉으로 보아서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데 왜 쓰러집니까?

영혼이 더렵혀졌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은 열등감, 수치심, 모멸감, 분노함, 자격지심으로 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내가 힘들고 지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영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회당에서 큰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모욕한 사람은 좀 있어보이고 뭐를 좀 아는 사람인가 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몇년을 함께해도 그분이 누구신지 도무지 모르던 제자들과는 달리 학식과 경륜이 있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경건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솔했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분리시키셨다가 다시 결합시키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을 이리저리 분리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며 예수님의 인격성을 꼬집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신성을 들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시라며 예수님을 극도로 높였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알아본 하느님의 속성을 예수님의 겉모습에 뒤집어 씌웠습니다. 

높였다가 낮췄다가 낮췄다가 높였다가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다루었던 것입니다.

즉 하느님 위에 올라선 것입니다.

하느님을 죽였다가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떨결에 고백했다가 예수님이 죽으실거라고 하자 자기가 예수님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큰소리 쳤던 장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봉헌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믿음이 경건하고 겸손한 고백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