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자녀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탄복하십며 결국은 가나안 여인과 그 딸에게 축복하십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왜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나몰라라 하시다가 나중에가서는 축복해 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신의 자녀들인 이스라엘의 어린양을 보호하고 사랑하듯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당신 자신의 자기 희생적 사랑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잠깐 동안 벌하시는 이유는 자녀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 죗값의 고통을 통해서
곧이어서 당신이 베풀어 주실 자애와 사랑이 얼마나 더 큰지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가나안 여인은 자기 딸 죄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 벌은 곧이어 받게될 축복을 위한 시금석 역할을 하고 있는 샘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고통이 아니라 곧이어 받게 될 용서와 사랑의 축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 투덜댄 자들은 모두 사십일동안 투덜된 그 날수대로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사십년동안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십년이면 몇 세대 정도 됩니까?
보통 결혼 40주년을 보내게 될 때 쯤이면 아들 손자까지 보아서 삼대 쯤됩니다. 옛날 같으면 사대 쯤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는 천대에 이르도록 자애를 베풀고 용서하시지만
지은 죄악과 악행과 잘못에 관해서는 그냥 넘어가거나 내버려두지 않고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대 사대까지 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삼대 사대 그러니까 뭐 대대로 벌받는구먼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 집안은 되는 게 없구먼 하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삼대 사대는 천대에 이르도록 자애를 베푸시고 축복하시는 무한한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대에 이르도록 축복받는 그 중에 삼대 사대에 이르기까지 벌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계명을 어겼을 때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는 고통은 사실은 온전한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좌절또한 철저한 좌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축복속의 고통인 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좌절 또한 행복속에 좌절인 샘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죄싯게 하지만 또한 죄많은 부모를 거룩하게 하는 것도 자녀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청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고통은 축복으로 그리고 행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은 느끼지 못하고 잠깐 잠깐 주시는 고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소중하다라는 주제로 제작된 에니메이션이 있는데요.
'강아지 똥'이라는 그림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강아지 똥'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개똥 취급을 받았습니다.
다만 가을 바람에 나뒹구는 감나무 잎삭이 위로가 될 뿐이었습니다.
가을 바람에 떨어져버린 나뭇잎은 정처없이 뒹굴다가 강아지 똥을 만났고
감나뭇잎과 강아지 통은 서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곧 추운 겨울이왔습니다.
나뭇잎은 강아지 똥의 마음을 헤아려주었고 그겨울 밤에 내린 눈이 다소곳이 서로를 감싸 주었습니다.
강아지 똥은 땅바닦에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는 자신을 한탄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낳겠다는 생각으로 그 겨울을 간신히 나고 있었습니다.
눈이 녹고 땅이 풀려 봄이 왔습니다.
봄비를 맞으니 서서히 자신의 모습이 허물어져 죽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강아지 똥을 뚫고 올라온 싹이 있었습니다.
그는 민들레였습니다.
결국 강아지 똥은 민들레에 좋은 거름이 되었고 예쁘고 큼직한 꽃을 피울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 주었습니다.
민들레 홀씨는 하늘 높이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축복받은 세상이었습니다.
이렇듯 무한한 축복은 인종을 초월하여, 지역을 초월하여, 세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이 직접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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