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도시 변두리 작은 본당으로 도서선교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본당에 도착하자 마자 한 아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와 함께간 수사님께서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그 아이의 본명을 부르며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다가와서 수사님 품에 안겼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수사님께 혹시 아는 아이인지 여쭈었습니다.
수사님께서는 모르는 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모르면서 어떻게 그 아이의 본명을 부르셨습니까?하고 여쭈었습니다.
수사님게서는 대답하시지 않으시고 미소만 지어 보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또 앞으로도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었습니까?
요한복음 어디를 봐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신 적이 없으신데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다만 유다인들이 말하는 '우리의 하느님'이 바로 그분이시라고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모세에게 알려주셨던 그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혹은 '엘로힘' 또는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그 하느님이십니다.
침묵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부르신 하느님은 침묵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은 말씀의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이름도 말씀(로고스)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하나가 되어 바벨 탑을 쌓는 것을 보시고 온 세상의 말을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요한 복음에는 한 처음 말씀이 계셨고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밝혀 놓으셨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말이 뒤섞여 갈라졌던 인류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쓰던 그 말씀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호칭할 때에 "야! 누구야! 하고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은 돌아다봅니다.
살아있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담벼락에 아무리 큰 글자로 자기 이름이 써있어도 외면해버립니다.
그것은 이미 죽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은 문자, 글자가 아니라 호명하는 그 자체 말씀으로 그 사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말씀 안에서 서로 물어보고 알려주어 함께 구원의 길, 일치의 길로 가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흩어졌던 사람을 모아들이시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말씀이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말고 서로 일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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