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한머금

다해 부활제4주간 토요일 요한14,7-14 더 큰 믿음

jasunthoma 2013. 4. 27. 05:10

요즘은 전화기가 너무 흔해져서 그럴 일이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에는 요구르트병에 구멍을 내고 실을 연결하여 전화기놀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낙시줄로 연결하면 더 잘 들린다고 해서 낚시줄을 풀었다가 엉켜가지고 혼난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당신이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언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하시는 일이고 두번째는 그보다 더 큰일입니다.

먼저 언급하신 일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로 언급하신 그보다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본문 끝 부분에 나오다시피 예수님 이름으로 청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청하는 일이 더 쉬워보이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크다고 하실까요?

지금에는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모세의 이름을 부르기가 더 쉬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께 청원을 한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해야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그대로 이루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믿는 사람은 복음 선포에 이어서 제자들이 그보다 더 큰 일도 더불어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다는 믿음을 전재로 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나는 심었고 그대는 물을 주었으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도 바오로의 방식과도 맞아 떨어집니다.

쉽게 애기해서 하느님께 우리의 청원이 도달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전달방식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아드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제자들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아드님이신 당신이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두번째는 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청하는 이방인들의 방법입니다.

당신은 곧 하느님이시자 하느님께로 우리의 청원이 상정되는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께 청하는가 아드님께 청하는가 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은 분명 더크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희를 위하여 빌어달라는 이방인들의 방법은 항상 더 큰 믿음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두번째 방식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보다 더 큰 일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죄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던 분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서 멈추면 안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기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기초입니다.

기초만 다져놓고 집을 짓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은 창립자 알베리오네 신부님이 복자품에 오르신지 10년째 되는 날입니다.

사람들이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에 누구보다 먼저 성모님께 알렸듯이 우리들도 우리의 복음선포 사도직이 삐걱거릴 때 창립자에게 먼저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창립자의 삶안에서 우리의 더 큰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