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희 수도회 두 분의 형제가 종신서원을 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그 가정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듯이
수도원도 한 형제가 입회를 하면 그 수도회에 한 가족이 됩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수도원에서도 막 입회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엄마와 아빠를보고 성장하듯이 입회자도 그 공동체에서 배우고 성장하여 비로소 완전히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이 어떤 곳이기에 그토록 거처할 곳이 많다고 하실까요?
우리가 아버지의 집을 아직 가보지 못했으니 알 수는 없지만
수도원의 생활을 보면 상대적으로 아버지의 집이 어떤 곳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선 모든 것을 버리고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니것 내것이 없으니 모두가 내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렸으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욕심이 사라지고 걱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도원은 걱정없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어린이가 아닌 한 아무런 걱정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걱정은 어떤 곳에 미련을 두는 한 쉽게 떨처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을 한다는 것은 사소한 사욕이 우리 앞을 가리고 우리를 지배할 때 발생 하게 됩니다.
입회를 앞두고 있을 때에는 내가 이 수도원 이 맞을까 저 수도원이 맞을까를 두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입회해서는 그런데 내가 왜 이 수도원에 들어왔을까하며 걱정합니다.
책임자가 되기 전에는 내가 할 일이 이 일일까 저 일일까를 두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책임자가 되고나면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은걸까하며 걱정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거처가 많고 할 일이 많다는 것은 곧 걱정도 많다는 말입니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자리가 이토록 걱정스럽고 마음이 산란하지만 그것은 아버지 집을 향한 단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서 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이세상에서까지 아무런 걱정없이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현세의 재물과 권력과 영예를 버릴 수 있는 것도 다 아버지의 집에 거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게 되는 현세에서의 고난을 즐겁고 기쁘게 받아 들인다면 그렇게 살아가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것은 걱정 중에서도 걱정없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예수님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향으로 오늘 하루 예수님 안에서 길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 그 진리대로 살아서 생명의 거처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한머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해 부활제5주간 월요일 요한14,21-26 사랑의 성령(스승) (0) | 2013.04.29 |
---|---|
다해 부활제4주간 토요일 요한14,7-14 더 큰 믿음 (0) | 2013.04.27 |
다해 부활제4주간 목요일 요한10,22-30 즐거운 복음 (0) | 2013.04.25 |
다해 부활제4주간 화요일 요한10,22-30 목자의 목소리 (0) | 2013.04.23 |
다해 부활제4주간 월요일 요한10,1-10 목자의 목소리 (0) | 2013.04.22 |